은행나무 장롱

입춘立春 지나고 우수雨水에 설날이라, 봄 다 되어 설날이라니, 윤섣달이 껴서 늦은건데 그래도 너무 늦게 찾아왔어. 한번쯤 잊고 가도 누가 뭐라 안 할 것 같은데 그건 또 아닌가 봐. 그렇다면 남들 다 맞이하는 민족 명절인데 나도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무얼할까. 그래 청소하자. 설맞이, 아니 봄맞이 집안 대청소.

언젠가는 안방 장롱 위에 올라가 솜이불 덮고 있는 먼지를 털고 닦아내리라 마음 먹은게 칠년이다. 십칠년 전 결혼하면서 저 장롱을 들여 놓고, 딱 한번 칠년 전에 이사할 때 청소하고 그 이후에는 한번도 청소를 한 적이 없었다. ‘내가 저 많은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잔다는 말이지’ 이런 생각 때문에 늘 찜찜 했는데 오늘 드디어 날을 잡았다. 먼지털이개를 들고, 대아에 물을 채워 그 안에 면수건으로 만든 걸레를 두어 개 담갔다. 고무장갑을 끼고, 식탁 의자를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먼지를 털려고 먼지털이개를 두어번 내려치는 순간, 학鶴 한 마리가 푸드득 내 눈 앞을 날아오른다. 깊게 잠든 학을 깨우고, 학의 둥지인 숲 속 나무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행나무 장롱이다. 칠기는 아니지만 십장생 문양을 수공예로 만든 제법 비싸게 들여놓은 장롱이다. 숲 속 솔나무에 긴 날개를 유유히 내리고 앉아 있는 어미학도 있고, 어미학 주위에는 먹이를 달라고 보채는 새끼 학이 있다. 먹이감을 찾아 비행하는 애비학도 있다. 달이 떠 있고, 숲 속 향기로운 바람이 솔솔 불어 오기도 한다.

이 은행나무 장롱은 98년 결혼 당시 내가 장만한 유일한 혼수품이다. 대개 남자가 집을 마련하고 여자가 세간 살림을 마련 한다는 우리 나라의 등식화된 결혼 풍습을 나는 따르지 않았다. 가진게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 전 1년 동안 처가에 방을 하나 얻어서 글 쓴답시고 하숙 아닌 하숙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희곡을 썼는데 대학로 연극이 지금도 별반 나아지지 않았지만 그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뮤지컬 대본을 써서 다른 작가들에 비해 조금 사정은 나았을지 몰라도 부모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고서 결혼을 한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을 때였다.

그런데 참 신기하기도 하지.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올린 ‘뮤지컬 신데렐라’ 때문에 모 텔레비전 아침 방송에서 잠깐 인터뷰를 했는데 처가 식구들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나를 보게 되었고, 이 때부터 처가 사람들에게 나의 호칭은 ‘작가선생’이었다. 이 때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신데렐라를 방영 했는데 신데렐라 신드롬이 있었던 시기였다. 더구나 뮤지컬 신데렐라는 우리나라 방송이 마침 위성방송을 준비하던 때여서 공연 실황을 그대로 녹화해서 위성 방송만 틀면 이 뮤지컬 신데렐라가 방송 되었다. 신데렐라 주제곡 음반은 당시 유치원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초롱언니 이정화가 녹음을 했는데 십 수만장이 팔려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내게 이러한 작가 생활이 돈과 연결 되지는 않았다.

아내는 당시 대학의 시간 강사였다. 체구는 작았지만 태권도 운동을 해서인지 다부져 보였다. 운동 하는 사람들 말투가 투박하고 단답형인데 아내도 그런 사람이었다. 인사성이 밝아서 멀리 골목길에서 보면 나를 향해 뛰어왔다. 어깨가 쫙 벌어져서 뛰어 올 때는 군인들 구보처럼 뛰어 오는데 왜 이렇게 촌스럽던지, 그 촌스러움 때문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다가 손도 잡고 결혼 하자고 했던 것 같다.

장모는 결혼에 반대했다. 가진게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즈음 나도 염치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집을 몰래 나와 극단 연습실에서 숙식을 하기도 했는데 아내가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는지 아내가 찾아오고나면 나는 다시 처가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장인은 결혼은 본인들이 할 일이지 부모가 나서는 일이 아니라며 장모의 반대를 제압했다.

결혼 날자는 잡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장모가 나와 눈만 마주치면 ‘집은 어떻게 하기로 했는가?’  남자가 전세든 뭐든 살 집은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장모의 물음에 대답은 못하고 ‘그래 결혼은 안해도 그만이지’ 하고 마음을 정리할 즈음

‘이런 미련한 사람. 바꿔서 생각해 보게. 자네가 세간을 마련하고 집은 여자한테 하라고 해 봐’ 장인의 충고 한마디가 ‘그래, 결혼은 해야겠다’로 선회하게 되었다.

장인은 장모를 시켜 전세를 얻게 했는데, 장모는 이왕 이리 된거 딸을 멀리 보낼 수는 없다 생각하셨는지 처가집 대문 바로 앞집에 전세를 얻었다. 처음 시작이 이렇다보니 지금까지도 처가 앞 옆에서만 살게 되었다.

세간도 따져보니 만만치 않았다. 집은 구해 뒀고, 결혼 날자는 아직 남아 있고, 그 때부터 나는 주말만 되면 아파트 이사 가는 집 근처를 맴돌았다. 세탁기, 냉장고, 텔레비전은 그렇게 준비했다. 중고지만 깨끗하게 닦고 가전제품 판매 대리점 가서 박스를 얻어다가 포장까지 해서 그럴 듯하게 준비 했는데 물론 아내가 도와주어서 가능했다.

침대보다는 온돌방이 좋다는 이유를 대서 침대는 아예 준비 품목에 넣지도 않았다.

그리고 가장 비싸다는 장롱을 사던 날, 나는 장모와 아내를 앞세우고 황학동 중앙시장에 갔다. 장모는 맘에 드는게 없는지 가구거리를 몇 번씩이나 오가며 갔던 집에 들어가서 물어보고 또 물어보는 것이다. 그러기를 한 참 후 장모는 썩 맘에는 안 들지만 하나를 골랐는지

‘자네 저게 그래도 값도 싸고 요즘 혼수로 많이 나간다는데 저걸로 할텐가?’

장모가 추천한 장롱은 알록달록 색이 화려한 조립식이었다.

‘아뇨 어머니, 그 옆에 걸로’

내 입에서 옆에 걸로 하는 순간 주인장 눈이 휘둥그레진다는 것을 알았고, 아내는 내 옆구리를 찌르고, 장모는 퍽이나 자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하는 눈치였다.

‘사위 분이 눈이 있으시네요. 이게 말이죠. 우리 나라에서 농을 제일 잘 만든다는 그러니까 명장이신 분이 만든 장롱인데...’

세칸짜리 은행나무 장롱이다. 대부분 두 칸짜리 조립식을 마련한다는데 세칸짜리 은행나무 원목 장롱이라니 장모가 놀랄만했다. 크기도 크기였지만 묵직한 무게가 마음에 들었다. 

농방 주인장은 애써 내가 사겠다는 장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십장생도 그럴 듯하게 설명하고, 분위기는 어떻고, 관리는 어떻게 하고...

그 즈음 나는 은행나무 침대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그 영화를 보면서 나도 저런 사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같다. 그리고 돈은 없어 가난하지만 사랑과 희망을 지켜줄 것 같아 은행나무 장롱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이 은행나무 장롱 하나로 나는 가난한 사위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중고 냉장고, 세탁기가 문제 될리 없었다.

장롱에 새겨진 십장생, 나무 색깔이 단아하다. 창문을 통해 볕이 들어오면 숲 속인양 착란이 일기도 한다.

돈 없어서 결혼 못한다고 핑계대시는 분들은 은행나무 가구는 꼭 장만 하시라. 방 없으면 보증금 없이 월 십만원만 내는 방은 내가 나서서 구해 줄테다.

(2015. 설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