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녀석이 연출했던 단편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배역은 아주 불쌍한 껌 장수 노인네.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르겠지만 딸 녀석이 챙겨준 옷을 갈아입고 보니
겉 모습 만큼은 영락없는 껌 장수였습니다.
제가 해야 하는 연기는
껌 몇 통을 들고 편의점으로 들어가 주인의 눈치를 살핀 다음
편의점 안에 있는 손님에게 껌을 사달라고 애원하는,
그것도 아무런 대사 없이 동정심을 유발하는 표정 연기였습니다.
필름 값이 장난이 아니기 때문에
NG를 내면 그 만큼 빈약한 제 주머니 돈이 작살 납니다.
어떻게든지 단 한 번에 연기를 끝내야 한다는 각오로
몇 번의 리허설을 거친 뒤 촬영에 들어갔습니다.
레디! 액션!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삶에 지친 껌 장수 노인네가 되어보자!'
제딴에는 열심히 감정에 몰입한다고 했는데...
딸애가 호통을 쳤습니다.
표정이 전혀 애절하지가 않다 네요.^^*
입가에 베어 있는 웃음은 도대체 뭐냐고 핀잔을 줬습니다.
자격지심이랄까.
’살림 형편도 변변치 못하면서 무얼 그렇게 여유로워 하냐?’는
항의의 목소리로 들렸습니다.
그래도 3번 만에 OK사인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이것이 제 삶의 화두라고 생각하며 지금껏 살아왔는데
진정으로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적이 있었던가?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인정할 수 없는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서 드러날 때 손가락질을 합니다.
마치 나와는 전혀 관계없다는 듯이...
하지만 손가락을 한번 들여다보세요.
엄지와 검지는 분명 바깥쪽을 향하게 되지만
나머지 3개의 손가락은 자신을 가리키게 됩니다.
쉽게 남을 비난하지만 내 자신에게도 그러한 면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유시민 의원이 국가 개조론에서 던진 화두는 ‘함께 사는 세상’입니다.
창의력,정직,성실,건전함,능력뿐만 아니라,
소심함,증오,욕심,나약함,게으름,무례함,아픔...
이 모든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도 있듯이 분명 내 안에도 있다는 것.
인정하고 싶진 않으시겠지만
내 안에 분명 다른 사람의 모습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함께 사는 세상’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