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융의 글은 아무리 아이디를 바꾸고 나타나도 항상 티가 납니다. 워낙에 얼척없는 논리로 유시민을 싸고 돌아서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데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번에는 5.18 광주항쟁 정신의 유일한 계승자가 유시민이라는 주장을 펼쳐 나를 실소케 하더니만, 오늘은 '유연한 진보'에 대한 어처구니 없는 주장으로 나로 하여금 기어이 글을 쓰게 만듭니다.
유연한 진보란 어제까지의 소신을 오늘은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건 기회주의에 불과한 것이죠. 유연한 진보란, 진보가 전통적으로 지녀온 '가치'는 그대로 고수를 하지만, 그것을 현실에 구현함에 있어서는 변화하는 현실을 고려하여 그 방법을 유연하게 가져갈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영국에서 나타난 블레어류의 '제3의 길'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노동당이 지녀온 '평등'이라는 가치는 고수를 하되, 이를 세계화된 오늘의 현실에서 구현해 나감에 있어 과거의 낡은 방식, 즉 생산수단의 국유화라든가 높은 세금/높은 지출이라는 큰 국가를 고집한다거나 하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유연한 진보란 '가치'는 그대로, '방법'은 유연하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를 칼 융은 완전히 곡해를 합니다. 자신의 소신을 주저없이 접을 수 있는 것이 유연한 진보랍니다. 그러면서 들고 나온 사례가 유시민 의원의 이라크 파병에 대한 입장입니다. 이게 바로 칼 융이 유시민한테 피해를 입히는 지점입니다. 유시민이 '기회주의적'인 작태를 유감없이 드러낸 사안을 가지고 '유연한 진보'의 좋은 사례라고 다시 상기를 시킴으로서, 유시민의 표결 때문에 열받았던 저같은 사람을 다시 한번 열받게 만드는 것이지요.
유시민은 파병에 관한 한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건 본인이 가장 잘 알겁니다. 유시민은 1차 파병논란 때 대통령의 비전투병 파병 입장을 옹호했습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저도 그 입장에 찬성을 했었으니까요. 그런데 정작 표결 때는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많은 사람이 의아해 하는 것은 당연했지요. 그래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유시민의 답변은 걸작이었습니다. '철군 계획이 빠져있어서' 반대를 했다는 겁니다. 뭐 무슨 이유를 가져다 붙이든 찬성 의원 이름 명단에 자기 이름 올리기 싫어서 반대를 한거지요. 바로 어제까지는 비전투병 파병 논리를 옹호하고 다닌 분이 말입니다. 이런 건 '유연한 진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회주의'인 것이고, '뒤통수 치기'인 것이지요. 자기 입장이 얼마나 비겁한 것인지를 유시민 본인이 잘 알기 때문에, 나중에 자신이 비겁했다고 자인하고 표결도 찬성으로 돌아선 것 아니겠습니까.
유시민은 장점이 많은 정치인입니다. 이 장점만 잘 살리고 홍보를 잘 해도 많은 지지를 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열혈지지자라는 사람이, 여덟개 있는 장점을 잘 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두개 있는 단점을 극구 변명하고 오히려 이를 장점이라고 선전하여 듣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해서 좋을 것이 뭐가 있을까 싶습니다. 유시민을 열심히 지지하는 것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하지만 그의 정치행보에 남겨진 가장 큰 오점 중의 하나인 파병 문제를 들먹이며 '유연한 진보'의 좋은 사례로 선전하는 것이 과연 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를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