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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갖기까지
유시민
79년 10월 26일 밤. 궁전동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리는 순간 유신체제는 붕괴되었다. 그 가을의 전국적인 학생데모와 부산 마산 시민 항쟁으로 불안에 빠진 유신 집권층은 서로 죽이고 죽는 가운데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그리고 봄이 왔다. 양심수가 석방되고 너도나도 민주주의를 칭송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유신만이 살길이다"고 떠들어대던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고 유신체제의 죄악상을 공개적으로 비판해도 잡혀가는 일이 없어졌다. 세상은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역사의 발전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열흘 붉은 꽃이 없고 십 년 가는 세도가 없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 것 같았다. 1980년의 봄에 79년의 겨울은 실로 '이상한 시대'였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쓴 메모지 한 장까지 범죄의 물증이 되는 그런 사회가 어떻게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단 말인가? 나는 희망에 가슴 부푼 3년째의 대학생활을 맞이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았다. 민주화가 소리높이 칭송되던 시대의 저편에서 다시 반동의 칼날이 준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79년 12월 12일 밤, 열 개가 넘는 한강 다리가 모두 차단되고 약수동에서 총성이 울리는 가운데 몇십 개의 별이 허망하게 떨어지고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이 실권을 장악했다는 외신보도들이 우리의 마음을 짓눌렀다. 4월에는 그가 중앙정보부장 및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임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최규하 씨가 유신헌법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데 반대한 YWCA 집회가 강제 해산되고 주동자들이 헌병들에게 입을 찢기는 등 혹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소문은 우리들을 전율케 했다. 언제 헌법이 민주적으로 개정되어 선거가 있을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유신잔당과 군부가 다시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5월에 접어들면서 전국의 모든 대학생들이 '전두환 퇴진'과 '비상계엄 해제'를 외치며 일제히 궐기했다. 5월 13일과 14일에 나도 광화문과 서울역 일대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고 다녔다. 나는 그때 총학생회의 간부로 뛰고 있었기 때문에 늘 시위의 선두에 섰다. 순진하게 민주화를 낙관하고 있던 시민들은 영문을 알지 못하고 학생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서울역에 20만의 시민·학생이 운집하여 계엄해제를 절규하는 시간에 잠실에는 탱크가 나타났고 효창구장에는 무장군인들이 집결했다. 앞으로 전개될 사태는 불을 보듯 명확했다. 충돌과 유혈,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무엇이 나타날지는 알 수 없었다. 시민들의 미온적인 호응과 계엄사의 강경대응 사이에서 고뇌하던 학생 지도부는 가두시위 중단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5·17이 왔다.
전국적으로 시위가 중지된 평화로운 밤에 5·17은 닥쳐왔다. 계엄이 제주도까지 확대되면서 주요도시에 계엄군이 진주했다. 나는 그 날밤 학교에서 체포되어 계엄사 예하 수사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광주의 피바람이 불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했고 YWCA 집회 주동자들의 입을 찢었던 장본인들, 즉 대통령 경호실 소속의 헌병들에게 내가 밟히고 걷어 채이고 얻어맞던 그 시간에 광주에서는 수천 애국동포가 동포의 손에 학살되고 있었다. 유신체제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혹독한 독재체제가 우리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는 다시 역사에 대한 환멸에 빠져들었다.
석 달만에 석방이 되고, 군대로 끌려가 32개월을 썩고 다시 사회로 돌아올 때까지도 나는 역사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희망을 버린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희망이 현실화할 수 있으려면 앞으로 엄청난 세월과 엄청난 희생이 소요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다시 행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세상은 넓고 큰데 나는 너무 작고 무력했다. 그러나 세상은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었다. 70년대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투옥과 고문을 무릅쓰고 반독재 투쟁에 나서고 있었으며, 제5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만 수십 명이 그것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더 많은 사람들이 80년 봄의 투쟁을 뒤늦게나마 이해하고 마음속으로 성원을 보내고 있었다. 세상은 유신 때나 마찬가지였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동포를 학살하고 들어선 정권을 인정치 않았으며, 그것을 배후에서 지원한 미국에 대해 비판했다. 엄청난 변화였다. 그리고 변화는 인간들이 변하지 않는 사회를 개조하기 위한 싸움에 나서고 있었다. 80년 봄의 그 엄청난 패배 속에서 사람들은 승리에의 더 큰 희망을 가졌고 승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더 깊이 연구했다.
달라진 사람들이 스스로 나서서 달라지지 않는 사회를 질타하기 시작한 계기는 85년의 2·12 총선이었다. 나는 84년 9월에 복학하자마자 프락치 사건으로 다시 투옥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현장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대우자동차 파업, 구로 지역 민주노조 연대투쟁, 서울 미국 문화원 점거농성의 소식은 감옥에 갇힌 나를 흥분케 하기에 충분했다. 학생뿐만 아니라 노동자들도 세상을 바꾸는 일에 나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부푼 희망을 안고 1년간의 징역살이를 마감했다.
86년 이후 나는 다시 행동으로 나섰다. 어두운 밤거리, 박종철 군 고문살해 사건을 규탄하는 유인물을 집집마다 배달하면서도, 인쇄골목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유인물 박스를 빼내오는 숨막히는 순간에도, 인쇄비를 마련하기 위해 밤새워 영문 번역을 하면서도, 나는 기쁨을 느꼈다. 87년 6월의 거리, 남녀노소 각계각층이 한 덩어리가 되어 외치는 독재타도의 구호를 들으며, 최루탄과 방망이로 무장한 전경의 벽을 육탄으로 부수고 그 독재의 흉기를 불사르는 매캐한 연기를 맡으면서, 나는 인간이 사회를 변혁한다는 진리를 확인했다. 사회와 역사의 주인은 인간이라는 것, 다수의 대중이 하나의 의지로 뭉쳤을 때 사회는 결정적으로 변화한다는 것, 이것은 교과서 속의 박제된 명제가 아니라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진리였다.
대학물을 맛본 지 이제 10년. 내가 이루어놓은 일은 별로 없고, 이 같은 인간과 사회의 변화에 내가 기여한 것도 아주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가 아주 작은 한 부분이나마 기여한 것을 나는 기뻐한다. 내가 만일 판사가 되어 법조문을 암송하거나 무고한 민주인사와 학생, 노동자들을 감옥으로 보내는 하수인 역할을 했다면 6월의 그 엄청난 대중투쟁을 보면서 기쁨이 아니라 공포를 느꼈을 것이며, 자기의 삶과 세상에 대해 무기력한 냉소나 흘리며 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스무 살 적에 내린 그 소박한 선택으로 10년을 살아왔다. 그리고 그 선택에 기초를 둔 실천 가운데 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과 신뢰를 배웠다. 그래서 내가 열 아홉일 때 했던 것과 같은 인생관, 고민을 가진 후배들에게 말하고 싶다.
"책 속에서 진리를 구하지 말고 법정에서 정의를 구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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