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아랍지역은 끝없는 모래세상, 열사의 땅이다. 조금의 빗줄기 대지를 어루만지면 이내 이글거리는 태양이 뒤이어 모든 것을 증발시켜버리는 목마름의 대지. 숲이라 말할 만큼의 나무도 없고, 모든 가축 배불리 먹일 초목도 없는 땅.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의 땅이랄 만큼의 척박하고 버려진 곳에도 수 천 년을 사람이 살아왔고, 고대문명도 활짝 피었으며, 오늘날에도 수많은 삶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 그곳에 녹아든 삶의 지혜는 물을 햇살에 빼앗기지 않고 보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상에 노출된 수로를 건설하는 대신에 그들은 지하로 모든 수로를 감추어 건설했다고 한다. 지상으로 노출되면 물의 증발을 막을 수 없었을 뿐더러 목숨 그 자체인 물이 적에게 노출되어 오염되거나 장악되는 그래서 모든 부락이 죽음에 직면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지하로 건설했다고 한다. 그 깊이가 수 미터에서 십 수 미터에 이르기도 한다고 하는데. 수로가 지나는 수 십 킬로미터의 곳곳에 숨구멍 같은 우물을 만들어 우물을 중심으로 목축을 하고 농사도 짓고, 말 그대로 오아시스 촌락을 건설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막 한가운데 삶의 기운 충만하게 하는 우물은 생명 그 자체다. 삶의 전부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민주주의를, 진정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갈망한다는 것은 어쩌면 사막위에 버려진 여행자일지도 모른다. 양피주머니에 남은 물은 이제 동이 나고, 시야에 보이는 것은 쇳덩이처럼 달아오른 모래언덕뿐인. 무소불위의 권력은 모든 것을 제 것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물질적인 것을 뛰어넘어 생각하는 것조차 자신을 따라야 문제삼지 않는다. 그것이 속성이다. 아무런 대책 없이 세월만 흘러간다면 모든 것은 그것으로 끝이다.
사막의 뜨거운 태양빛을 가릴 갈대 엉성한 움막이라 지어야 내일이 있다. 그늘에서 숨 고르고 나면 우물을 파야 살아남는다. 타는 갈증을 해소하고 초목이 푸르게 자라게 할 단하나의 해결책은 우물이다. 차고 맑은 물, 차고 넘치는 우물만이 희망이 생명줄이다.
샘이 솟는 우물은 그 모양새 어떻든 간에 우물이다. 올망졸망 돌멩이 쌓아 만든 우물도 우물이요, 네모반듯하게 다듬어 만든 우물도 우물이요, 표주박으로 길어먹는 우물도 우물이고, 함지박 메달아 깊이 길어 올려야 하는 우물도 우물이다.
우물은 맑은 물 끊임없이 샘솟는 것이 중요하지 겉모양은 중요하지 않다. 아니 겉모습도 필요에 따라 모양이 중요할 경우도 있을 터이지만, 우물의 본질은 물이다.
사람이 기대어 삶을 영위하고 꿈을 꿀 수 있는 생명을 길러내는 물이 우물의 본질이다. 그것이 목적이다. 우물을 구성하는 재료는 목적일 수 없다. 우물의 형태가 목적일 수 없다.
그것은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소중한 물을 물답게 보존하고 지켜내는 도구일 뿐이다. 층층이 쌓아 올린 돌무더기 우물에도 널따란 생소나무를 바닥에 우물정자로 기초하고 돌을 쌓아올린다. 어쩌면 정치인이란 그런 생소나무의 역할이 아닐까한다. 그 위에 차곡차곡 쌓아지는 수많은 돌무더기는 그 정치적인 교집합의 우리들일 수도 있고..... 건강하고 단단한 옹골찬 소나무 기초에 박아두고 건강하고 튼실한 그의 조력자가 켜켜이 쌓여 만들어내는 튼실한 우물은 그것 자체로 생명을 잉태하는 삶의 자궁이요, 어머니의 품이다.
이제 열사의 땅에 푸른 초목 무성하게 자라게 할, 우물을 파기위한 첫 삽을 떴다. 한길 두길 파내려 가다보면 바위를 만나기도 할 것이고, 땅이 연약해 무너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시원스레 솟구칠 물을 포기할 수는 없다. 가야하는 그래서 마침내 도달해야 하는 이상이 있다면 어떤 장애물에도 겁냄 없이 한발 한발 나아가자. 우물을 만드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 우물의 최대의 수혜자도 결국 우리다. 우물의 겉모습에서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자. 어떤 것으로 우물을 쌓아 올려야 하는 것에도 너무 민감해하지 말자. 천년을 두고 맑은 물 솟구치는 좋은 우물은 끝없이 퍼 올려 물의 고임을 막아야 건강하게 숨 쉬는 물이다. 고이는 모래도 수시로 청소해 주어야함은 물론이다.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 또한 지나치는 모든 것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흐르는 물이 바다만을 목적으로 흘러만 간다면, 그래서 그를 필요로 하는 모든 목숨가진 것들 외면해 버린다면, 그것이 진정 물일까? 그렇게 다다른 바다가 푸르고 건강하게 생명 품어줄까? 아무것도 깃들어 살지 않는다면 이미 바다는 바다임을 버려야한다.
목마른 양떼들 흙먼지 날리며 찾아야 우물이다. 찾아와 퍼내고 길어내야 우물은 그 존재의 가치가 빛날뿐더러 그 스스로의 목숨도 연장된다. 쓰지 않는 우물은 사라지고 만다. 모래에 점령되어 흙먼지 풀풀거리는 빈 구덩이로 변하고 만다. 그러면 마을도 없다. 사람 사는 소리도 없다. 타는 햇살에 점령당한 죽음이 있을 뿐이다.
건강하게 펄떡이는 살아있는 모든 것 가슴에 품고 당당히 바다에 다다를 강물을 위해, 작지만 튼실하고 건강한 우물을 파자. 우리의 ‘첨맘님’ 우물바닥 깊은 곳에 옹골차게 단단한 생소나무기초로 박아두고서 천년의 세월 묵묵히 견디어낼 단단한 우물하나 깊숙이 파내려가자. 자유롭고자 하는 모든 영혼 평온히 깃들어 살 생명의 우물을 만들어내자.
때 없는 모래바람 수시로 분다 해도, 깃든 모든 생명 오롯이 지켜내는 오아시스로 변할, 그래서 풍년가를 목청껏 불러도 좋을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내자. 김치 한 조각에 막걸리 한사발이면 배 두드리며 행복에 겨울 그날을 위해.....
사상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 사람답게 자유를 추구하며, 진리의 본질에 가깝게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다. 사상을 위한 사상은 죽은 자의 넋두리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있는 생명을 챙길 수 없는 물은 이미 물이 아니듯, 말의 수렁에서 숨 헐떡이며 발버둥칠 일이 아니다. 모래언덕 위의 구중궁궐보다 깃든 생명 품을 줄 아는 오아시스의 물 한 방울이 더욱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