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언론인들의 모임인 관훈클럽 총무를 맡은 관계로 강연 사회를 보게 되었다. 지난주에
는 진보·보수 지성을 대표하는 두 분을 초청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작가인 이문열
한국외대 석좌교수에게 한국 사회의 위기 타개방안을 들었다.
백 교수 말씀 가운데 보수파가 새겨들을 내용이 있었다. “한국의 보수 진영에 논리가 있
느냐.”는 것이다. 백 교수는 “자기 마음에 안 맞는 사람은 불순분자로 몰아 잡아가면 되었
지, 논리를 개발하거나 시민운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고 과거의 보수파를 격하했다.
최근에는 일부 좌파 운동가들이 입장을 바꿔 이명박 대통령쪽으로 가기에 우파에도 상당한
이론이 나올 줄 알았는데, 정권의 별동대 역할을 하느라고 기대만큼 못 하더라고 했다.
뉴라이트를 지칭하는 듯했다.
얼마 전 박상익 우석대 교수의 언론 기고문이 떠올랐다.
박 교수는 관변을 기웃거리는 사이비 보수주의자들을 비판했다. 근대 이데올로기로서 보수
주의는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에서 시작한다. 버크의 저서 ‘프랑스혁명에 대한 성찰’은 보수
주의의 경전이다. 그 책의 한글 번역판이 이제야 준비되고 있다니 한심한 노릇이다.
버크를 모르면서 보수주의자인 양 떠드는 것은 마르크스를 모르면서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질타했다.
백낙청·박상익 교수의 비아냥에 보수 이론가들은 기분 나쁠지 모르 겠다. 하지만 현 정부·여
당 내에, 또 정권을 지지하는 모임 내에 지성 인 사회에서 인정받는 보수 이데올로그(이론
적 지도자)가 포진해 있 는지 의문이다. 버크가 주창한 보수주의는 수구가 아닌, 개량주의
다. 독재에 반대하고 전통속에서 자유를 구체화하려고 했다. 낭만이 깔 린 진보이론보다 더
정교함을 요구받는 게 정통 보수이론인 것이다.
경제 상황이 나빠서 이 대통령의 인기가 떨어졌다고 한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나 전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국제경제 위기가 심화된 지난해 말 이후 이 대통령의 지지도가 오히려
상승커브를 타고 있다. 이문열 작가는 “대동지환(大同之患)은 환난이 아니다.”라고 했다. 전
세계 모두가 겪는 어려움 때문에 정권이 흔들릴 일은 없다고 본 것이다.
이문열 작가의 설명은 일리가 있다. 그럼에도 우려는 여전하다. 지식 인 사회에 어필하고,
국민들과 소통할 수 있는, 큰 틀의 정권 논리가 없다면 대동지환 핑계에 기대는 것은 한계
가 있다. 기업을 지원하고, 세일즈 외교를 강화하고, 녹색성장을 외치고…. 실용을 앞세운
이런 것들은 기능적이고, 세부 방법론일 뿐이다. 이들을 관통하는 이론체 계가 없다면 대동
지환이 정권의 파국을 가져올 수 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 지식인의 훼절이 시비가 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군사독재를 옹
호하는 이론을 개발하려니 얼마나 궁색했겠는가. 그래도 1급 이론가들을 정권 차원에서 강
제로라도 동원했다. 지금 정부는 민주선거로, 큰 표차로 출범했다. 일류 이데올로그를 창출
할 여건을 갖추었으면서 실제는 그렇게 못하고 있으니….
실용과 기능만을 앞세워서는 국민들의 마음을 잡을 수 없음을 지난 1년이 보여 주고 있다.
나라를 운영하는 기본철학이 확고하면 보수주의도, 신자유주의도 무리없는 변형이 가능하
다. 잠재력 있는 내부 인사가 공부를 바짝 하든가, 간판급 이데올로그를 초빙해 실용에 설
득력 있는 이론 무장을 시켜야 집권 2년차 희망이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