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도위원님을 보았던 것은, 1999년 무렵 무주리조트에서 열린 회사 노동조합 대의원 교육시간 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수수하면서 어디에도 자만심이라고는 없이 열정적이고, 앞서 간 노동자들을 위해 격정적인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현대차는 몇 달을 끌어서 고작 100여명 정리해고 했는데, 삼성은 소리소문 없이 몇천명을 정리해고 했다고 삼성은 역시 소리없이 강하다고 당시의 삼성 광고를 패러디 하며 울분을 토로하였습니다.
오늘 다시 인터넷으로 지도위원님의 글을 접하니 새삼 그때의 뭉클했던 감동이 되살아 납니다. 교육을 받던 이전에도 그러하였지만, 그 이후에도 저는 지도위원님과 같이 열정적으로 불의에 대해 슬퍼하지도 못하였고, 그 슬픔을 행동으로 옮기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냥 이 시대 손해 보지 않고 조용히 살고 싶어하고, 울분은 이불 속에서나 풀고, 저의 말을 잘 들어 주는 아내에게나 큰 소리로 세상의 정의를 이야기 합니다. 저는 그러한 이 시대의 겁 많은 보통의 노동자로서 지도위원님께 고견을 구하고저 합니다.
노 전 대통령님을 관통하는 지도위원님의 시선은 배신감입니다. 전 두 분의 친밀감을 알지 못하니 지도위원님의 글로 밖에 판단할 수 없습니다만, 정치를 시작했다는 이유만으로 노변호사의 도움에 대한 마음마저도 사기꾼의 돈을 떼먹은 것 마냥 일말의 부채의식도 없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힘없는 노동자의 이름을 팔아 인권변호사라는 경력을 쌓고 그것으로 정치에 입문하려는 도구로 이용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까. 그래서 그 이전까지의 그의 행동들이 가식스러웠습니까. 행동의 변절이 확인되지도 않던 그 시기에 이미 지도위원님께서는 그와 함께 이론을 토론하던 소모임을 잊고, 군사정권 시절 해고된 노동자의 그 막막한 눈빛을 들여다봐주는 무료법률 상담소도 잊고, 전태일의 조촐한 제상에 유령들처럼 절을 하던 밤을 잊고 6월 항쟁, 최루탄 가루 속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동지를 잊었습니까.
그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나 한번 되돌아 보시기를 권고합니다. 그는 지도위원님보다는 항상 부유했고, 지도위원님 보다는 늘 사회적 강자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드릴 것이 없었습니까. 그는 국회의원이었고, 장관이었고, 대통령이었으므로 그는 무엇인가 항상 베풀어야 하는 존재였습니까. 과연 그가 늘 강자의 위치에서 억울한 노동자가 죽음으로 항거할 때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 줄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되돌아 보시기를 권고합니다. 지지도 낮은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때, 지도위원님은 서푼 짜리 지지하나 그에게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누가 노 전대통령 앞에서 배신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그는 늘 주기만 해 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늘 배신자였습니다.
나는 또 묻고 싶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을 지나고 운동권 3분의 1이 떨어져 나간 것이 오직 김영삼 대통령의 책임이었는지. DJ가 대통령 되었을 때 사라진 재야가 오직 김대중 대통령만의 책임이었는지. 오롯이 남은 노동자가 오직 노무현 대통령만의 책임이었는지를 나는 묻고 싶습니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약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님들이 살아온 삶, 생사를 넘나들며 살아온 님들의 삶에 정말 거짓없는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국민들의 가치관이 바뀌고, 국민들의 정서가 바뀌고, 국민들의 삶 자체가 바뀌고, 그리고 진보세력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이 바뀌는 급변하는 세월속에서 님들은 어떻게 변화하였습니까. 이 모든 것을 외부의 탓이었고 님들과는 상관이 없는 문제였습니까
링컨의 노예해방이 노예에게 단지 자유만을 주었을 뿐 평등한 권리까지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유는 정부가 줄 수 있는 것이지만 평등한 권리는 국민을 설득함으로써 얻어집니다. 뜨거운 6월 항쟁에서 국민은 노동자들에게도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주었습니다. 하지만 국민이 준 것은 독재정권에 억눌렸던 자유를 준 것일 뿐, 평등한 노동자의 권리까지 쥐어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부와의 투쟁이 끝나고 무섭고도 잔인한 자본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국민들은 변하였습니다. 정부가 님들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한 국민은 정부에 대한 투쟁을 지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국민의 시선에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싸움, 당사자의 싸움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정부가 자본가의 편을 드는 것이 못마땅 하시겠지요. 하지만 엄밀히 국민은 노동자의 정부를 만들 수 있는 자율과 권리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 기회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은 님들의 정부에 대한 투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방법이든, 그렇지 않은 방법이든 님들이 이야기 하는 그 보수세력이 국민의 마음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님들이 국민의 시선을 붙잡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져 왔습니다.
대통령이 일거에 님들의 바램을 이루어 주기를 바랬습니까. 국민의 마음도 모아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이 님들의 바램을 이루어 주기를 바랬습니까. 위원님이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4번을 선택했듯이 대통령에게 모여진 힘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힘없는 대통령 한 분 세워놓고 그렇게 그렇게 요구만 했습니다. 님들은 대통령에게 국민이 찬성하든, 반대하든 개의치 말고 님들의 바램을 이루어 달라고 요구만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그토록 싫어하던 독재를 님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용해 주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민주주의 원칙은 간단합니다. 다수결입니다. 많은 표를 가지면 모든 권한을 행사합니다. 이 제도가 타당한지에 대한 부분은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내 주위에 많은 사람이 날아와 둥지를 틀 수 있는 풍부한 가지와 풍성한 잎사귀를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나와 완전히 일치 하지 않더라도 이 땅의 노동자를 살리는데 행동으로는 못해도 표 하나만으로도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둥지를 틀 수 있게 배려해야 합니다. 그들이 곧 실질적 권력을 변화시킬 완벽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왜 동료를, 한때 동료였던 사람을 변절자로 규정하고 보수세력 보다 더 미워 합니까. 왜 그들이 돌아올 수 있는 문을 닫아버리고 그들이 주어진 그 자리에서 표나지 않게 님들을 지지할 수 있는 기회마저 주지 않는 것입니까.
황석영을 변절자로 규정하고, 김지하를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워라”는 글 하나로 뇌리에서 지웠으며, 노무현의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끝났다는 말”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분노함을 표현합니다. 그들이 살아왔던 삶도, 그들과 함께 나누어 왔던 추억도 변절이란 쓰레기통에 묻어버립니다. 심정적으로 님들에게 동조하고 지지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님들은 잘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님들에게 변절자로 규정된 그 분들의 삶의 궤적을 살펴 보아도, 그분들이 정말 군사 독재를 자행했던 사람들이나, 지금의 여론을 장악하고 있는 보수세력 보다 더 나쁘다고 저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님들은 황석영을 김지하를 노무현을 똑 같이 님들의 울타리에서 내던지고 문을 닫아버립니다.
사람을 살려야 하는데 이렇게 살리든, 저렇게 살리든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목적보다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노선의 차이는 내부의 문제일 뿐, 국민은 그 차이를 알지 못합니다. 국민은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차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님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신념상의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님들이 움직여야 하는 국민들에게는 중요하지도 않고 감동스럽지도 않는 것입니다.
보수세력은 노무현을 부동산 종부세, 금산분리등을 들어 친북 좌빨세력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으며, 님들은 비정규직, FTA, 이라크파병을 들어 보수세력과 다름없다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링컨의 노예해방을 다시 상기해 봅니다. 노예해방론자들은 링컨의 정책이 느려 터졌다고 비난하였습니다. 노예제찬성론자들은 링컨의 정책이 너무나 급진적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노예해방론자들은 링컨이 남북전쟁을 노예해방과는 무관하게 만든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링컨이 받았던 가장 강력한 비난은 링컨이 남북전쟁을 노예해방 전쟁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 느려 터지고 급진적이라 비난 받았던 링컨이 아니었으면 노예해방은 그렇게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회색지대를 변절로 규정하는 대한민국에서 절충의 미학이라고 부르는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것이 가능할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습니다.
지도위원님은 지배가 없는 세상을 꿈꾼다고 하셨습니다. 내일 당장 그 세상을 이룰 수 없다면 오늘 무엇을 할 것 인가를 고민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티 하나 없이 완벽한 그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가진 원론적인 방법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혁명을 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혁명은 사회 구성원의 또다른 고통을 감수하게 만듭니다. 그 고통의 감수를 지도위원님도 원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길은 결코 님들의 힘만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님들과 같은 사람들을 만들어야 하고 님들과 뜻을 함께하는 사람을 만들어야 하고, 또 자기 욕심을 위해서 일지라도 님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고 가슴저미는 고통이 엄습해 온다고 해도, 이후에 노동자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다면, 이후에 노동자들의 고통스런 희생을 더 이상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면 그 길을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아직도 노무현이 말한 사람사는 세상과 님들이 말하는 사람답게 살고 싶은 세상이 어떻게 다른지 알지 못합니다.
다음 생에 오실 땐, 그냥 태생대로 기름밥 먹는 노동자로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더 이상 서로를 비난하지도, 비난할 필요도 없는 그런 동지로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은 이미 지도위원님 곁에 많이 계십니다. 그 많은 분들 곁에 노무현 한 분 더 붙는다고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다음 생에 다시 그분이 오시면 그때는 지도위원님이 그의 동지가 되어주시기를 간청드리고자 합니다. 그의 힘든 길에 동반자가 되어 주시기를 간청드리고자 합니다. 비록 느렸지만 사람사는 세상을 염원했던 그의 굳센 신념을 그때는 한번 믿어봐 달라고 간청드리고자 합니다.
현실과 타협하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겁이나서 감히 세상을 향해 나팔을 불 수도 없습니다만, 도덕이 사라지고, 정의가 사라지는 이 시대에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 후배들, 내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지인들이 지배없는 세상에 대해서 물어올 때, 이 땅에서 찬란하게 꽃 피울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물어 올 때, 고개 들어 님들을 가르킬 수 있도록 꿋꿋한 등대로 자리해 주시기를 염치없게 간청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