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4월 벚꽃이 진지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봄날 제가 입대를 하는 순간입니다.
논산훈련소 정문 앞에서 마지막 황금과 같은 시간을 담배 한 대로 태우면서, 문득 떠오른 논산훈련소 조교출신인 예비역 선배의 금과옥조와 같은 당부가 생각났습니다. "훈련소를 들어가면 가족, 친구, 여친과 마지막 배웅을 허락하는 공간이 있는데, 그 지역이 마지막으로 민간인으로서의 예우를 받는 공간이다."
"그 지역을 벗어나는 순간 첫 ‘시범케이스’가 되는 우를 범하지 말거라. 한 놈은 반드시 죽도록 맞는다. 중대한 잘못을 해서 맞는 것도 아니고 그를 때리는 조교도 그가 미워서 때리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 순간에 한 희생양이 필요할 뿐이다. 가까이 있는 놈이 당하고 눈에 띄는 녀석이 당한다. 그 상황을 피하려면 대열의 중간으로 숨어라."
과연 선배의 충고처럼 나는 상어떼에 쫓기는 전갱이의 본능처럼 무조건 무리의 중간으로 파고들었습니다. 모자를 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눌러쓰고 물 빠진 군복을 잘 다려서 입은 조교들이 소리를 지르며 다가왔고 바로 가까이 있던 한 녀석에게 무지막지한 구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군대는 얼빠진(?) 민간인 수천명을 편리하게 통제하는 방법으로 전체를 구타하거나 얼차려 주는 비효율적 방법을 택하기 보다는 지지리도 운이 없는 한 놈만 선택해서 패는 현명한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한 놈은 몸으로 맞고 나머지는 정신적으로 흠씬 맞는 거지요. 그 사태 이후 명령체계는 아주 원활하게 돌아갔습니다.
무리를 통제할 책임을 부여받은 지휘관과 조교들은 하루빨리 똑같은 군복에 어울리는, 통제가 용이한 병사를 만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의지대로, 몇 주가 지나면 “폭탄을 안고 적의 탱크로 뛰어 들어 자폭하라”는 명령에 적어도 따르는 ‘시늉’은 하는, 제법 그럴듯한 병사들이 양성됩니다.
며칠 전 김제동이 얻어맞았습니다. 단지 운이 없어서 두들겨 맞은 훈련병과는 상황이 좀 다릅니다. 그의 절친 가수 윤도현이 프로그램에서 퇴출 당한지가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공포심을 망각했을까요. 그럼, 김제동이 의도적으로 구타를 유도했을까요?
고래를 먹은 위대한 새우도 당하는 시절인데, 전갱이 주제에 상어떼에 맞서다니 어리석기 그지없어 보입니다. 무리의 가장 가운데, 눈에 띄지 않는 곳이 가장 안전한 장소임을 그들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나마 굶주림을 채운 포식자가 떠나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그는 그 기회를 스스로 마다한듯 보입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하는 개체가 많을수록 그 공동체가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고 며칠 전 누군가의 강의에서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렇습니다. 아마 김제동도 공동체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일부분을 희생할 의지를 가진 개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더 많은 김제동이 나와야 대한민국이 진보하겠지요.
며칠 전 mbc PD수첩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김영수 해군 소령의 군납관련 내부고발을 방송했습니다. 작년 다음 아고라에 "한반도 물 길잇기 및 4대강 정비 계획의 실체는 대운하"라는 양심선언을 했던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의 김이태 박사의 불합리한 징계사례를 비춰보면 김영수 소령도 고난을 피하지는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건전한 개체들이 무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이기적 개체들만으로 가득 채워진 사회가 될 것입니다. 21세기의 초입에서 대한민국을 깊이 알려고 하면 할수록 두려움과 좌절만이 커집니다.
그러나 윤도현, 김이태, 김제동, 김영수 등과 같은 이타적 개체들의 존재를 확인할 때 마다 ‘아직 절망하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라는 책에는 “진실의 승리와 더불어 영원한 이름”이라는 부제가 붙은 “드레퓌스사건”이 첫머리에 올라 있습니다.
경우는 조금씩 다를지라도, 드레퓌스 만큼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그 이름들을 잊지 않고 오랫동안 기억해야 합니다. 능력있는 누군가는 기록할 의무도 있습니다. 김제동 kbs퇴출에 열 받아서 긁적이다가 역시 결론은 삼천포 비슷한 곳으로 와버렸습니다. 토요일 저녁에 무슨 궁상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