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을 보내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유시민입니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2003년 2월 24일, 대한민국 제 15대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의 5년 임기가 끝나는 바로 그 날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의 김대중은 어떤 존재입니까? 어떤 분들은 그가 처음 대통령에 출마한 1971년 이후 3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사랑하고 지지했습니다. 민족의 지도자라고까지 했습니다.
그가 독재정권의 탄압을 받는 것을 보면서, 납치당하고, 가택연금을 당하고, 사형선고를 받는 것을 보면서 함께 아파했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슴 깊이 삭여야 했습니다. 5년 전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고 밤새워 노래 불렀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김대중 대통령은 무엇을 남겼습니까? 안타까움, 실망감, 더러는 배신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를 미워하고 혐오했습니다. 빨갱이, 권모술수의 대가, 권력욕의 화신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비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김대중과 가까운 모든 사람을 싸잡아 미워했습니다. 북한의 김정일 정권에게 돈을 퍼주고 로비를 해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고 험담을 합니다. 정권을 교체해 김대중과 측근들을 감옥에 보내자고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을 떠나보내는 오늘, 우리 모두는 차분하게 그와 그의 시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속에 남은 사랑과 증오의 찌꺼기를 걷어내고, 우리가 격동의 현대사 고비 고비에서 만났던 정치인 김대중을 평가해 봅시다. 그가 우리 나라의 민주화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IMF 경제위기 극복과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영호남의 정치적 분열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지, 그와 주변인물들이 얼마나 심한 비리와 부정을 저질렀는지, 구구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지금 정치인 김대중보다는 제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보았던 인간 김대중을 생각합니다. 그는 자기의 시대를 만들었지만 그 시대를 초월하지는 못했습니다. 민주주의, 인권, 사회정의, 자신이 옳다고 믿은 이러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그것을 가로막는 세력과 혈투를 벌였지만, 스스로 그 가치를 온전하게 체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민주투사인 동시에 권위주의적 가부장이었습니다. 지역감정의 피해자인 동시에 때로는 그것을 냉정하게 활용한 전략가였습니다.
저는 지난 1980년대에 들었던 그의 인생철학을 아직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인간 김대중은 옳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시기가 있었고, 그래서 그 '무엇이 되기 위해', 대통령이 되기 위해 '옳게 사는 길'에서 벗어나기도 했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많은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IMF 경제위기를 신속하게 타개했고 한반도 정세를 평화 무드로 전환시켰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저지른 잘못이 여럿 있지만, 그것은 어렵지 않게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어서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이룬 업적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밝은 빛을 내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나 김대통령이 행복한 노후를 맞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두 아들을 차가운 감옥에 보낸 '실패한 아버지'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실패한 아버지'가 되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거대한 정치적 성취와 뼈아픈 개인적 실패를 동시에 경험한 노대통령을 이제는 정치적 논쟁의 고삐에서 해방시켜 줍시다. 정치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삶의 모든 에너지를 역사 속에 쏟아 붓고 떠나는 하나의 인간으로, 그를 배웅해 줍시다.
한 시대가 오늘 막을 내립니다. 그 시대를 만들고 이끌었던 인물이 오늘 청와대를 떠나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의 시대가 남긴 유산까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두운 권력문화와 깊어진 지역갈등, 병들고 부패한 정당, 기득권을 끌어안은 채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는 그의 옛 추종자들, 이런 좋지 못한 유산을 평가하고 정리하는 일은 남은 사람들, 뒷 세대, 우리 국민들의 몫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새 대통령과 함께 우리가 마음과 뜻을 모아 그 일을 합시다.
라디오 21 청취자 여러분, 여러분과 함께 떠나는 대통령에게 작별 인사를 보냅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모쪼록 평안한 노후를 보내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유시민이었습니다.
2003년 2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