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이 국회의 요구를 수용하여 개헌유보로 결정났다. 그동안 개헌을 위해 동분서주 했던 지지자들의 한숨소리가 쟁쟁하다. 이해한다고는 하지만 속으로야 서운함과 허탈함으로 가득 했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노무현은 한 번 꺼낸 말에 끝까지 책임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번 개헌발의는 부결이든 찬성이든 간에 뭔가 결과를 가져올 줄 알았다.
결국은 유보가 되고 다음 정권으로 넘어가 버렸다. 바라던 바는 아니지만 애써 위로해서 노 대통령이 나름대로 얻을 것은 얻었다는 것에 주목하려 애쓴다. 물론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솔직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개인적으로도 노대통령의 이번 개헌유보 결정은 당혹스럽다. 아니 뻘쭘하다 할 수 있겠다. 개헌발의가 성사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런 저런 얘기를 풀었는 데 전제부터 삐끌어졌으니 말이다.
노 대통령의 개헌발의에 대해 각 정당들이 '정략적'이라고 몰아붙였고, 노 대통령은 '정략적'이 아니라고 답변해왔다. 우리도 그런 노 대통령의 진심을 알리기에 애썼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는 얘기다. 지지자로서 당연히 할 행동이긴 하지만 내심으로는 어쨌을까 싶다.
열린우리당이 뻘짓하고, 탈당파들의 모지리 같은 행동과 뚜렷하게 차기정권을 담보할 로드맵이 안보이는 가운데 이해찬과 유시민 등의 지지자들의 잠재적 후보군을 위해 노대통령의개헌발의가 지금의 정치 지평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수단으로 삼길 바랬을 지 모른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노 대통령의 심중에도 그 정도의 효과를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노대통령은 순리적으로 진행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부가적인 효과로 생각했던 것이지 그것을 위해 개헌발의를 고집한 것은 아니다.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의 두 축은 한미FTA와 개헌이라고 한다. 한미FTA는 대외적으로, 개헌은 대내적인 국가운영 미래의 타겟으로 설정한 것이다. 체결이든 찬성이든 간에 그 효과는 노 대통령의 임기내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두 가지 중 어느 것이던 성과가 좋으면 당시의 정권이 칭찬받고, 좋지 않으면 당연히 노 대통령에게 미뤄질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대통령은 자신의 영달이 아닌 국가 통치기반의 미래지향적인 정책 결정에 항상 올인해 왔다.
그것은 지지자들을 위해서 일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만 대통령이 존재한다는 가이드 라인을 제시한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악몽으로 여길 정도의 한나라당의 집권이 우세하다. 유시민의 말처럼 99%가 될 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노 대통령의 개헌발의가 국면 전환용으로 작용할 수 있기를 우리 스스로가 너무 강렬하게 바라지 않았을까? 노 대통령은 '꿩잡는 게 매'라는 심정일 뿐인데 말이다.
국회가 6자 동맹으로 노 대통령에게 개헌유보를 요구 했을 때 우리는 분개했지만 다들 어렵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함량 미달이고 한나라당의 당론에 대해 도무지 신뢰할 수 없지만, 어쨌든 절차적으로는 하자가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 중심제에서 대통령이 통치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지만 행정부와 입법부는 서로 평등하고 상호 견제의 위치에 있다. 물론 교과서적인 얘기기는 하지만 합리적 절차를 중요시하는 선진 정치로 가는 길이 교과서적인 정치 행위에 대한 존중이다.
노 대통령의 기본 철학을 나타내는 말이 '원칙과 상식'이다. 함량 미달이든 신뢰성 부족이든, 열린우리당의 배신이든 간에 국회는 나름대로 절차를 이행하여 노대통령의 요구에 답했고, 이것을 무한정 핑퐁치기 한다는 것은 진짜 정략적으로 비춰질 수 밖에 없다.
정치는 명분을 누가 잡느냐에 따라 가장 중요한 승부의 향방을 결정 지울 때가 많다. 지금, 누구나 대선을 염두에 두고 있고, 그 대선의 향방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노대통령의 개헌은 향후 정국의 불확실성에 예측할 수 없는 지뢰를 심어 놓는 것과 같다.
한 마디로 뜨거운 감자인 것이다. 한나라당으로서는 부결하자니 후폭풍이 두렵고, 찬성하자니 노무현의 정국 주도에 따른 지난날의 악몽이 일어날까 두려운 것이고, 열린우리당은 지리멸렬한 자신들의 입지에 개헌이 가져다줄 효과에 아무런 확신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부결 되었을 경우 아예 회생 불가능한 타격을 입을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개헌유보 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의 한계다. 정치인들이 표에 연연해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겠지만 우리나라 만큼 단기적인 성과에 목 매달며 표 구걸하는 나라는 별로 없지 싶다. 일본의 정치후진국 생태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 같아 안타깝지만 노 대통령의 이번 개헌유보를 보면서 일말의 희망을 보기도 한다.
대통령이 제의하고 국회가 논의하고, 다시 대통령이 요구하고 각 정당이 허울이라 할지라도 대통령이 법적으로 주어진 권한에 대해 반대하는 대안을 제시한 것은 나름대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판례로 작용할 수 있다.
어찌보면 노대통령은 이걸 더 원했을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원포인트 개헌이 시간과 비용의 절감이라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단점도 만만찮기 때문이다. 임기일치제 때문에 1년 이하일 경우 대행체제로 간다는 것이 악명 높은 유신헌법 외에는 없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포인트 개헌이 이루어 진다고 해도 헌법의 기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지금 헌법에서 단임제의 폐해를 원포인트 개헌으로 보완한다고 해도 대통령제도 아니고, 내각제도 아닌 기형적인 부분은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원포인트 개헌은 국정 수행의 연속성을 국민이 한 번 더 판단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든 것일 뿐이고 입법부와 행정부의 힘의 불균형은 여전히 애매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노 대통령의 원포인트 개헌은 결국 다음 정권에서 개헌을 유도하기 위한 정략적 술수에 불과 했다는 것이 아니다. 두 가지를 모두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원포인트 개헌은 노 대통령의 얘기에도 있듯이 시간과 노력을 절감하기 위한 단계적 제안일 뿐이다.
원포인트 개헌이 성사되더래도 나머지 현 헌법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추후에 더욱 더 심도 깊은 논의를 거쳐 다시 한 번 개헌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얘기했다. 자신이 제의한 원포인트 개헌이 오랜 독재의 종식을 위해 급조된 헌법의 기형성에 종지부를 찍는 출발점이 되길 바랜 것이라 볼 수 있다.
노태우의 6공화국 출범이 후 김영삼부터 노태우라는 군사독재 정권과의 차별화를 위해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라는 억지스러운 명칭을 붙여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봐야 언론이던, 일반 사람들은 그냥 '정부'일 뿐인 데 말이다. 무엇보다 정부의 연속성은 그 전의 정부가 혁명에 의하지 않고서는 부인되어서는 안된다.
노 대통령은 정치권이 나름대로 수긍가능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할 경우 분명히 개헌발의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오히려 구속력을 가지는 전반적인 개헌 논의에 대한 정치권의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한 압박용 카드일 수도 있다.
이래저래 노 대통령은 양손에 손해나지 않는 카드를 들고 지지자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노무현의 머리속에는 국가의 비젼과 국민의 미래의 발전만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한 줌도 안되는 '노빠'들은 예측할 수 없는 대통령의 지독한 국가와 국민 사랑에 한숨질 수 밖에 없다. 정략적으로 접근 할 수 있는 데도 내심 정략적이길 바라는 지지자들을 배신하는 그를 한편으로 서운해 하면서, 한편으로 자랑스러워 해야 하는 애환을 늘상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운명이라면 운명이랄 수 밖에….
한 가지 더 부연하자면 개헌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 5당 1단체의 신성동맹으로 맺어진 개헌유보는 '철회'가 아닌 '유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좀 더 정교한 접근이 필요하긴 하지만 대선주자들의 대선 공약 검증에서부터 토론, 각 당의 대선에 임하는 행동에 대해 가장 객관적인 리트머시 시험지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차기 정권이 누구든지 간에 개헌은 '유보'로서 약속된 대가를 요구할 수 있다. 그것은 차차기 정권에 대한 검증의 기반을 이루는 핵심요소로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노무현은 참 지독한 사람이다. 조금 쉬운 길을 갈 수도 있는 데, 조금 지지자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행동을 할 수도 있는 데, 굳이 이쪽 저쪽 욕을 먹는 새로난 길을 가면서 우리에게 '정략적'이라는 말을 하는 그가 지독하지 않을 수 없다.
노 대통령은 늘상 길게 보는 것을 원해왔다. 원포인트 개헌보다는 약간 시간이 지체되더라도 내각제도 아니고 대통령제도 아닌 다른 비합리적인 요소까지도 바로 잡을 수 있는 개헌논의와 그 결과로서 포괄적 개헌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다.
결과론적일 수 있지만 최선이 차기정권에서의 책임있는 '포괄적' 개헌이고, 차선이 원포인트 개헌이 아닐까 한다. 결국 정략적인 노 대통령의 개헌일 수 있지만, 그 정도의 정략이라면 얼마든지 웃으면서 맞이할 수 있는 것이 개인의 생각이다. 단지 지독하다는 생각은 든다. 지지자들이 '원칙과 상식'을 얘기하긴 해도 조금 융통성을 바라면서 생활할 수 밖에 없는 데 말이다.
에잇! 지독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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