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는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선서를 한
2003년 2월 25일부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대통령은 스스로 자신이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 대통령임을 선언하였는데
이 순간 아무도 이 말이 무슨 말인 줄 모르고 있었다...
단 한 사람...노무현 대통령 말고는.
그는 더이상 주권이 그전처럼 권력집단에 농락당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으로
검찰 개혁에 맞서는 젊은 검사들과 설전을 벌이기도 했으며
결국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 기무사....
그 막강한 권력의 탑을 허물고
그들을 바닥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 다음 진정한 주권자인 국민에게 돌려주었다.
이 '경천동지'할 사건에 대해 이 땅의 지식인들, 언론들은 대체로 함구했다.
워낙 엄청난 사건이기도 했지만
'설마'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음이라 잘 몰라서겠지...
권력의 그 달콤한 맛을 아직은 몰라서겠지...
그러나 그런 생각은 노무현이란 사람을 잘 몰라서였다.
박정희 유신독재가 10.26 사태로 무너진 뒤
박정희의 비호세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가 일으킨 광주사태...
왜 정치신인 노무현 의원은 20년 전 광주청문회 때
전두환에게 명패를 던졌겠는가?
한국현대사에서 뿐만 아니라
20세기 세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비극 가운데 하나인 광주항쟁.
<9일간의 무정부 상태에도 불구하고 광주에서는 은행과 백화점 등에서
강도사건이 하나도 없었으며 계엄군의 봉쇄로 외부와 차단되어
식량과 생활필수품 공급이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매점매식으로 폭리를 노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식량이 떨어진 이웃과 함께 쌀을 나눠 갖기도 했다.
또한 총상으로 인한 환자들이 급증하여 피가 부족해지자
헌혈하는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 '20세기 대사건 79장면 중'에서 321-322쪽.
http://www.hani.co.kr/parkjd/image/881118.jpg
정치 신인 노무현은 전 국민이 그랬던 것처럼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해자들은 발뺌만 했으며 이들의 가증스러움을 도저히 참을 수 없던
그는 마침내 명패를 던지며 권력의 부도덕함에 진저리를 쳤을 것이다.
광주항쟁의 역사적 의미는 이후 정치가 노무현의 정치적 잣대가 되어 그의 심장과 함께
늘 맥박으로 뛰었을 것이다.
그리고 16대 대통령 선거 전후...
<...노무현이 당적을 두고 있었던 새천년 민주당은 대선 1년 여를 앞두고 극심한 내홍에 휩싸여 있었다. 당내 소장파들이 부패 추문에 시달리는 낡은 동교동계 구파를 물갈이하는 등 당의 정체성을 선명히하자는 '정풍 운동'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정풍 운동'은 당이 정체성의 깃발을 다시 세우자는 뜻도 있었지만 대선을 앞두고 수세에 몰려있던 민주당의 부활을 꾀하는 노림수이기도 했다. 이에 '정풍 운동' 과정 속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를 어떻게 선출하면 좋겠느냐는 논의가 자연스레 수면 위로 올라왔고, 미국의 예비선거제를 원용한 국민경선제로 흩어진 민심을 끌어모아 대통령 후보 경선을 진행하는 안으로 당의 의견이 모아졌다.
후보는 국민경선제를 거쳐 선출하는 방식으로 결론이 났지만, 문제는 국민경선제를 언제 실시하느냐였다. 당내 경선 후보간 의견은 '지방선거(6·13) 이후'와 '이전'으로 양분됐다. 노무현은 "지방선거 전에 대선 후보를 선출하지 않으면 선거를 치를 구심점이 없어지고 책임 소재를 두고 논란만 분분할 것"이라면서 지방선거 이전에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게 좋다는 의견을 냈다.
노무현은 또 그것이 "선거 득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당내에서 의견을 수합한 끝에 새천년 민주당의 국민경선제는 지방선거 전에 치르기로 했고, 구체적인 시기는 3월과 4월로 결정이 났다.
16부작 정치드라마로 불렸던 국민경선제는 제주를 필두로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50%)들과 국민(50%)들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민경선제에는 노무현을 비롯해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이상 가나다순) 등이 후보로 출마하여 누가 더 새천년 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적합한지를 놓고 승부를 겨뤘다.
대회 1회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제주에서 한화갑 후보가 의외의 1위를 차지하면서 국민경선제는 그 막을 올렸다. 제주에서 노무현은 득표 3위를 기록했다. 두 번째 울산에서는 부산 출신인 노무현이 가볍게 1위를 했다. 다음은 광주에서 경선을 치를 차례였는데, 이변은 바로 그 광주 땅에서 시작된다.
부산의 노무현이 광주에서 당당히 득표 1위를 거머쥔 것이다. '이인제 대세론'이라는 말을 지어내며 당내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었던 이인제와 호남 지역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는 한화갑을 모두 밀어낸 대이변의 승리였다.
노무현은 당시 광주 1위를 기록한 다음 연단에 서서 자신의 승리가 "광주의 승리, 민주당의 승리, 한국 민주주의 승리로 이어질 수 있게 하겠다"면서 감격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후 노무현은 '노무현 대안론'을 퍼뜨리며 단숨에 지지율이 급상승했고(노풍: 盧風), 이인제의 텃밭인 대전·충청권을 제외한 거의 전 지역을 석권해나갔다.(경선 끝자락이었던 경기 경선에서는 정동영이 1위 차지.) 그리고 2002년 4월 26일, 서울 경선을 마지막으로 노무현은 새천년 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노무현은 대선 후보로 선출된 다음에, 대선 승리를 위한 계획으로 '민주세력대통합론'을 내놓았다. 87년 대선에서 양김이 분열되면서 쪼개졌던 민주화세력을 하나로 묶어내 한국의 미래를 함께 열어제치겠다는 포부였다.
이를 위해 노무현은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 민주세력 통합을 이야기했고 지방선거 때의 연합을 위해 후보 추천을 받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노무현은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통일민주당 시절 김영삼으로부터 손수 받은 손목시계를 내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민주세력대통합론'은 국민들에게 대선 승리를 위한 정략으로 읽혀지면서 그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이 일은 노무현 지지율 하락의 한 빌미가 되고 말았다. 악재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노무현이 당적을 두고 있던 새천년 민주당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아들은 홍업씨와 홍걸씨의 비리로 국민의 지지에서 계속 멀어지고 있는 터였다. 이 일은 새롭고 신선한 이미지였던 노무현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줬고, 지지율은 본격적인 내림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노무현은 당의 지지율 하락과 본인의 지지율 급락 속에서도 지방선거 승리를 위한 전략과 행동에 부심해야 했다. 이는 대선 후보로서 선거에서 책임있는 위치에 서야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노무현 자신이 국민경선제 실시 시기로 지방선거 전을 거론하며 "후보가 지방선거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고 한 말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노무현은 부산시장을 반드시 당선시키겠다고 강조했다.(한이헌 전 감사원장을 후보로 내세움.) 또한 자신의 '후보 재신임'을 내세우며 선거 결과를 책임지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
하지만 새천년 민주당에서 돌아선 민심은 노무현의 외침을 외면했고,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광역단체장에서 호남과 제주 등 4석만 건쳐 대참패했다. 대선을 6개월 남짓 남겨둔 시점에서 당내는 "이러다 대선에서 패하는 것 아니냐"며 불안감에 술렁거렸고, 노무현의 개혁성 등 그의 색깔이 탐탁치 않았던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집단적으로 '노무현 흔들기'에 나섰다. 노무현은 선거 전 약속한대로 "후보 재신임을 묻겠다"고 했고 당 회의에서 후보 재신임을 받아냈지만, 이는 의원 전체의 총의는 아니었다. 여기에 월드컵 바람을 타고 정몽준이 정풍(鄭風)이라는 거센 돌풍을 일으키자, 노무현은 지지율도 토막이 나고 당내 의원들로부터도 배척받기 시작했다.
'노무현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이거니와 '후보 교체론'까지 나왔다. 노무현은 경쟁력이 없는 만큼 정몽준을 수혈해 대선 새 판 짜기에 나서야하지 않느냐는 정치공학적 판단이었다.
10월 들어서는 상황이 더욱 어렵게 돌아갔다. 수도권 의원을 중심으로 새천년 민주당에서 대규모 탈당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이들 선도 탈당에 뒤이어 수십명의 의원들이 탈당길에 따라 나섰고, 이들은 '후보단일화협의회'(후단협)을 결성하여 노무현에게 단일화에 나설 것을 압박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원칙없는 단일화를 반대"한다면서, "국민들이 대선 후보로 노무현을 뽑았으니 만큼, 그 민심을 저버려서는 안 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무렵 탈당은 후단협 한 갈래로만 진행되지 않았다.
전용학(새천년 민주당 대변인 등 당직 역임) 등을 필두로 한나라당으로 당을 옮기는 탈당 행렬도 이어졌다. 상대적으로 노무현에 우호적이었던 소장파에서 탈당 의원이 나왔다. 김민석은 정몽준의 신당 세력과 연대하러 당을 떠난 것이다. 11월 들어 노무현 진영의 입장이 조금 뒤바뀌기 시작했다. "원칙없는 단일화에 반대한다는 뜻에는 변함이 없지만, 국민들이 원한다면 단일화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면서 '국민경선 방식'의 단일화 방안을 제시했다.
국민통합21과 후단협 측은 노무현 진영 측의 제안을 반대하며 '대의원경선 방식'의 단일화 방안을 역제안했다. 겉으로는 "국민 경선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속내는 대의원 경선 방식이 정몽준 측에 더 유리해서였다. 국민경선이냐, 대의원경선이냐를 놓고 양측은 팽팽하게 대립을 했다.
새로운 제안은 노무현 쪽에서 먼저 나왔다. 노무현 진영은 국민경선 실시가 물리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수용하여 '여론조사 방식'의 경선을 새롭게 제안했다. 마침 판세는 1강(이회창) 2중(노무현-정몽준)의 구도로 바뀌고 있던 차였다. 국민통합21도 더는 단일화 방안을 놓고 입씨름을 벌일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노무현과 정몽준은 밤늦게 직접 만나 단일화 협상에 나섰고, 러브샷으로 소주잔을 들며 '여론조사 방식'의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협상 타결을 알렸다.
단일화 협상 파기와 재협상, 텔레비전 토론과 여론조사를 거쳐 2002년 11월 24일 노무현-정몽준 단일후보는 '노무현'으로 최종 판가름이 났다.(여론조사1: 노무현 승리, 여론조사2: 무효-이회창 지지율 낮음, 역선택 의심)
그리고 마침내 200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근소한 차로 이기고 당선됐다. 1년 전 지지율 한자릿수에 그쳤던 노무현이 일국의 최고통치자인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어 노무현은 2003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참여정부의 신호탄을 쏘았다.....>
--- '위키백과'에서 따옴.
그리고 그동안 밤을 낮삼아 일해 온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미국과의 FTA를 체결하는 등 한국경제를 오늘처럼 반석위에 올려놓았다.
이제 정치발전을 위하고 국민의 권리를 신장시키기 위해
정치모리배들의 얕은 수작을 돌파하면서
지금 개헌 발의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개헌을 반대하는 정치인들이여! 니덜이 대통령을 아냐? 아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