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이 ‘나’를 규정한다
(서프라이즈 / 내과의사 / 2009-07-23)
민주당을 가리켜 친노 그룹은 지역주의 정당이라 비판하고, 민주당 내부에서 반노정서를 가진 정치세력은 친노 그룹을 영남패권주의에 매몰되었다 말한다. 이른바‘난닝구-빽바지 싸움’이다. 하지만 선명성을 기치로 내건 진보신당과 민노당이 보기엔 양측 모두 기회주의적 보수정치세력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물론 진보신당이나 민노당 몫으론 ‘얼치기 좌파’, ‘귀족 노조’ 따위의 찬사(?)가 준비되어 있긴 하다.
민망한 이야기지만 한나라당이 보기엔 다들 똑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한나라당의 입장에서라면 민주당이나 친노나 진보신당, 민노당 모두 조중동 조폭 언론으로 모욕주고, 경찰 곤봉으로 두들겨 패고, 검찰이 조져서 감방에 처넣으면 그만인, 저렴하고 던적스럽고 천하디 천한 인생들일 뿐이다.
물론 나에게도 양아치 조폭무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저들을 ‘쥐새끼와 똘만이들’이라 부를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나는 쥐새끼들의 진실을 신문에 대서특필 할 수도 없고, 저들을 정당한 공권력의 심판대 위에 서게 할 수도 없다. 집요하게 한 인간의 명예와 인격을 능멸하여 죽음으로 몰고 가는 힘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왜? 나에게는 자유는 있으되 권력은 없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사람을 치어죽인다고 지구상 모든 자동차를 폐차장에 보낼 수는 없다. 교통사고는 운전자, 자동차, 도로여건, 교통량 등 다양한 변수에 의해 발생한다. 우리는 교통사고를 최소화하기 위해 이런 변수들을 안전하게 통제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도, 내일도 세상 어디에선가 사람은 차량 사고로 목숨을 잃곤 한다. 그래도 자동차는 절대로 멈추질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에게 물어보라. ‘내일부터 나는 자동차 없이 살 수 있을까.’ 라고.
권력은 확실히 자동차보다, 어쩌면 신관이 장착된 포탄보다도 위험한 수단일 것이다. 나는 노무현이 권력에 대해 가졌을 선한 의지와 판단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검찰의 작태를 보자면 노무현이 권력을 다루었던 방식에는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3살 어린아이가 원자폭탄을 가지고 노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이명박의 방식을 벤치마킹해야 된다고 말하고자 함은 더더욱 아니다.
미디어법의 불법 통과에 대해 우리는 모두 분노한다. 양아치 조폭들이 법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사람들의 입과 귀와 눈을 접수하는데 우리는 막지 못했다. 무엇이 가장 문제일까. 권력이다. 사치스럽게 온전한 권력 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우리 편에게 의회권력의 절반 가까이만 있었어도 미디어법은 저지할 수 있었다.(지역주의 민주당은 우리 편 아니라고 말할 인간일랑 이제 그만 나가 놀아도 된다.)
권력이 다루기 어렵고 위험한 수단일지언정, 우리가 꿈꾸는 합리성과 보편성이 지배하는 세상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권력이다. 우리에게 온전한 권력을 누릴 역량과 기회가 없을지라도 약육강식 정글의 법칙이 인간성을 말살하는 처참한 세상의 도래를 막기 위해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 역시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권력’이다. 우리는 부단히 권력행사의 방법론을 고민해야 하지만 권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거다.
하지만 우리가 권력을 마주한 태도는 어떠하였던가. 권력을 향한 과정도, 권력을 향유하는 주체도,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도, 권력의 지배를 받는 대상조차 모두 완전무결하고 순수하지 않으면 권력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극단적 이분법 아니었던가. 그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조금이라도 순수성을 의심받는 모든 세력들은 배척당했고 공공의 적이 되었다. 끊임없이 우리편을 줄여나갔다. 어중이 떠중이 천 만명보다 똘똘한 놈 세 명이면 세상을 바꾸고도 남는다고 하면서.
오늘도 우리는 쥐새끼만도 못한 저들에게 저렴하고 던적스럽고 천하디 천한 인생들이라는 조롱을 받으며 살아간다. 나는 모멸감에 치가 떨린다. 나의 모멸감은 공허한 외침, 쥐새끼를 쥐새끼라 불러주는 당연한 명명법으로는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영혼의 앙금이 된다. 결단코 응징해야할 저들 앞에서 어차피 다 똑같은 저렴하고 던적스럽고 천하디 천한 인생들은 서로를 헐뜯으며 더욱 비참한 인생으로 곤두박질치고야 만다. 그래도 권력은 의미 없다 말할 것인가. 한 점 얼룩이라도 떨어진 권력이라면 더럽고 추한 것이라 내팽개쳐 버릴 것인가.
결국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다. 의회 권력으로 막아내지 못한 미디어법은 장외의 권력, 가장 본질적인 시민의 권력으로 제어하든가, 그냥 받아들이든가 양자택일 할 수밖에 없다. 전자를 택한다면 우리는 또 전경의 방패와 곤봉과 구둣발이라는 폭력과 맞서 싸울 각오를 다져야 한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다같은 대한민국의 시민들 아니던가. 이 모순의 반복이 나는 정말 싫다. 그래서 더럽고 추한 것이라 우리가 내팽개쳐 버린 권력이 너무도, 너무도 아쉬울 뿐이다.
나에게 미워할 놈은 하나로 충분하다. 사랑할 대상도 하나라면 다만 인생의 축복으로 알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조중동 한나라당을 나는 죽어서도 용서하지 못한다. 천만년 세월이 지나도 나는 저들을 증오하고 저주할 것이다. 놈들은 나에게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요건을 확실히 갖춘 존재들이다.
미치도록 사랑하고, 열정으로 헌신하며, 긍지로 숭배할 대상을 나는 아직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종교를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을 나는 부러워한다. 나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언젠가 나에게도 어떤 가치나 신념에 나를 몰입시킬 기회가 올지도 모를 일이다.
저주와 증오. 사랑과 헌신이라는 양극단의 사이에도 나의 감정이입을 기다리는 수많은 대상이 존재한다. 무엇으로 삶의 여백을 채울 것인가. 미워할 놈 하나 빼고 전부다 끌어안을까. 사랑할 이 하나 빼놓고 모두 다 나쁜 놈으로 만들어 버릴까. 행여 미워하기도 사랑하기도 모두 싫은 무엇인가를 마주한다면 그냥 무시해 버리고 사는 것도 괜찮은 선택은 아닐까.
미디어법. 투쟁의 막이 올랐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내 적에 의하여 자리 매겨지는 나의 위치가 피할 수 없는 나의 자리였다.” 결국 나는 적에 의해 규정된다. 적들이 보기에 저렴하고 던적스럽고 천하디 천한 인생들이라면 그들은 우리편이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미워할 놈 하나 빼고 모두 끌어안기로 한다. 설령 아군이라 믿은 누군가가 나의 뒤통수를 찌를지라도 쥐새끼에 물려죽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행복할 것이다. 앞으로 나란히, 옆으로 나란히, 한사람이라도 더 우리들 곁에 서도록 하라. 그리하여 이 추악한 세상을 단죄할 강철대오를 이루도록 하라.
(cL) 내과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