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한국 정치 이의있습니다" 」, 역사비평사에서 나온 책에 첨맘님이 '추천의글'을 쓰셨습니다. 이에 소개합니다^^
|추천의 글|그의 고뇌와 생각을 다시 경청한다
“대통령님, 정치권에 동력이 없고 국민들도 관심이 없습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는 꼭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지만, 어떻게 해도 지금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 문제는 다음 사람들한테 맡기고, 이제는 대통령 권한만으로도 할 수 있고 또 국민들이 좋아하는 일에만 집중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제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한 끝에,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해결은 못 해도, 그래도 문제가 있다는 말은 해놓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대연정 제안 때문에 사방에서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던 2005년 여름, 국회의원 선거구제 개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노무현 대통령과 주고받았던 대화의 한 토막입니다. 이 책, <노무현, “한국정치 이의있습니다”>는 그가 “말이라도 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누군가 언젠가는 꼭 해결해주기를 바랐던, 대한민국 정치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고민을 담은 책입니다. 집필은 실무자들이 했지만 진짜 글쓴이는 노무현 대통령입니다. 책 곳곳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육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처음 국회의원 출마를 한 이후부터 청와대를 떠나기까지 20년 동안 정치를 했습니다. 정치인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된 후에도, 그리고 퇴임한 다음에도 변함없이, 정당의 발전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습니다. 그는 정치를 하는 동안 거의 언제나 어떤 정당의 당원이었지만, 2003년 11월 열린우리당 창당에서 2004년 4월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까지의 짧은 시기를 제외하면, 한국 정당 일반은 물론이요 자신이 속한 정당에 대해서도 만족을 표시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저는 기억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뚜렷한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면서 철저히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국민 다수의 동의를 얻어 현실을 바꾸며 오래도록 국민 속에 뿌리내릴 수 있는 좋은 정당의 당원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소박한 꿈을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특이한(unique)’한 정치인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선 그 자신이 매우 특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정치 환경과 시대 상황도 특이했습니다.
정치인 노무현은 정당을 이끌어본 경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정치 역사에 처음으로, 당원과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국민경선에서 승리함으로써 민주당의 대통령후보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례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은 2002년 당시 보수 세력의 역정권교체를 우려한 유권자들이 “본선에서 이길 수 있는 후보”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입니다. 국민경선 선거인단은 수도권 민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진보적 정치 노선과, 아울러 여러 차례 민주당 후보로서 부산에 출마했던 진정성과 영남 지역 득표력을 높이 평가했기에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습니다.
그가 승리한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 굴하지 않고 법률가로 정치인으로 성공한 사람이 풍기는 강력한 매력, 깊은 사색에서 건져냈음이 분명한 빛나는 말들, 억눌린 사람들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정의감, 이런 것들이 수많은 시민들로 하여금 그를 사랑하고 그의 승리를 위해 참여하고 봉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정치생명을 걸고 지역 대결의 정치 구도라는 부조리에 정면 도전했던 그의 강인한 신념과 용기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노무현은 지역 대결의 정치 구도에 맞서 싸운 덕분에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었던 바로 그 정치 환경을 해체하려 했습니다. 대개의 정치인은 자신을 만들어준 정치적 환경을 자산이자 기득권으로 쥐고 있으려 합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달랐습니다. 그는 지역 대결의 정치 구도를 허무는 것을 자신의 역사적 소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이 ‘구시대의 막차’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그 역설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 안았던 것입니다.
국민은 누구나 좋은 정치를 원합니다. 좋은 정치는 어떤 정치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국민의 다양한 소망과 요구를 빠짐없이 반영하고 최대한 실현하는 정치일 것입니다. 이런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도록 우리 헌법은 정당 설립과 정당 활동의 자유, 민주적 선거제도 등 정치적 기본권과 절차를 분명하게 규정해두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는 좋은 정치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국민들뿐만 아니라 정치인들 스스로도 민주화 이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정치를 좋은 정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 정치인 노무현은 대한민국 정치 현실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합니다. 좋은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에 대한 생각, 좋은 정치를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제도 개혁과 정치 문화 혁신에 대한 생각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현실정치 진단의 중심에 놓인 것은 지역 대결의 정치 구도에 대한 강렬한 문제의식입니다. 이것이 정책 대결의 정치 구도를 봉쇄하여 정치 발전과 사회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삶의 어느 영역이나 그렇듯, 정치도 적절한 또는 유효한 경쟁이 있어야 발전합니다. 유권자의 신임을 받기 위한 경쟁이 있어야 국민이 주권자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경쟁이 없으면 정당과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정치를 하게 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주의는 공존과 통합의 기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많은 국민들이 서로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자기의 소망을 최대한 이루어나가는 절충과 타협의 기술이라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현하려면 맹목적이고 감정적인 지역 대결의 정치 구도를 온존시키고, 증오와 반목의 정치 문화를 재생산하는 불합리한 선거제도를 개선하고 합리적 정치 문화를 키워야 한다고 그는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정당제도, 선거제도, 권력구조 등의 개선과 관련한 고민을 털어놓고 여러 가지 제도 개선을 제안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살아 있었을 때 누구도 이 제안을 진지하게 경청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는 떠났지만, 한국정치에 대한 그의 고뇌와 생각은 여기 남았습니다. 지금이라도 그의 제안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면 갑작스런 이별이 준 고통을 한 움큼 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09년 6월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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