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영 하면 항상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87년 서울시청 광장에서 이한열 열사 장례식 노제가 끝난 뒤 재야 지도부와 백만 군중이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할 때 최선두에 서서 청와대로 진격하자고 선동하던 앳된 대학생. 당시 전대협 초대 의장이었고 지금 열린우리당 초선 의원이다.
이인영 의원(이후 경칭 생략)은, 지난 4월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에서 유시민 의원(이후 경칭 생략)을 집단적으로 비난했던 소위 '386 출신' 의원들과 달리 험악했던 논쟁에서 비켜나 조용히 지방을 돌면서 장영달 의원이 지도부에 입성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대연정 국면에서 열린우리당은 양극화 해소를 통해 민생을 챙겨야 한다며 청와대와 당의 이른바 '투 트랙(two track)' 론으로 재야파 수장 김근태 장관의 복심을 대변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차분한 논리와 꾸준한 실천이 이인영의 스타일이다. 최근 선거구제를 둘러싼 정계개편 논란에 대해 유시민을 겨냥한 글에서도 그의 스타일이 잘 드러난다. 기존 386 출신 의원처럼 유시민의 스타일 혹은 싸가지를 문제 삼지 않는다. 조심스러워 하면서도 차분하게 유시민을 비판한다. 비록 반독재 투쟁의 역사와 민주대연합의 성과를 강조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비장하거나 오바하지 않는다. 유시민이 가볍고 발랄하게 쿨하다면 이인영은 무겁고 우직하게 쿨해 보인다.
인상비평은 이만 접고 이인영이 쓴「다당제의 함정 - 민주화의 퇴행 그리고 지역주의 덫」을 비평해보자. 이인영이 주장하는 요지는 글 제목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즉, 다당제가 되면 지금까지 힘들게 쌓아온 민주화의 성과를 무로 되돌려 놓을 수 있고 오히려 지역주의가 더 강화될 수 있으므로 지금처럼 양당제가 바람직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우선 이인영을 비롯한 386 출신 혹은 재야파 의원들의 안이한 현실 인식을 지적하고 싶다. 특히 이인영의 의식은 아직도 87년 시청 광장에 머물러 있다. 군사파쇼라는 거악(巨惡)을 상정하고 민주 대 반민주로 선명하게 갈라 치는 소위 '민주대연합' 전략은, 당시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진영 논리였다.
결국 민주대연합을 성사시켜 거악의 상징인 이회창의 대세론을 두번이나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군사쿠데타 원조 김종필까지 민주대연합에 포함시켜 'DJP 지역 연합'으로 정권을 교체했고 재벌 정치인 정몽준마저 민주평화개혁 세력으로 둔갑시켜 호남-충청 연합 정권을 재창출했다.
하지만 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 20여년이 흘렀고 정권을 교체한 지 10여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한나라당을 거악으로 상정하는 네거티브 전략은 '역(逆) 색깔론'과 다를 바 없다. 정권교체 이후 성과와 한계가 분명해진 민주대연합에 여전히 의지하려고 한다면 지역 연합과 네거티브 전략으로 국회의원이라는 기득권을 쉽게 유지해 보려는 '정치적 알리바이'가 아닌지 되묻고 싶다.(민주대연합을 비판한 「김근태를 위한 변명」참조)
두 번째로 이인영이 주로 비판하는 다당제를 살펴보자. 논의를 제대로 진행하기 위해 먼저 다당제의 기준을 분명히 하자. 이인영은 독일을 예로 들면서 "기본적으로는 양강 구도가 유지되면서 소수정당이 결합되어 연정을 구성"하는 것을 "본질적으로 양강 정당 구도"라고 일반화해 버린다. 하지만 양당 구도의 기준이나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소수당이 다수당에게 복속되는 논리라면 최근 독일 총선의 결과 기민당(CDU)과 사민당(SPD)이 대연정을 구성한다면 독일은 졸지에 기민당 일당 독재 체제가 된다.
저명한 정당(party) 정치학자인 사르토리(Sartori, 『현대정당론(Parties and Party System)』 제5장, 동녁)는 '적실성(relevant)'있는 정당의 기준으로 '연합 가능성(coalition potential)'과 '협박 가능성(blackmail potential)'을 들고 있다. 연합 가능성은 말 그대로 연립 정부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며 협박 가능성은 법률안을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해하면 된다. 사르토리는 그 기준에 더해 적실성있는 '반체제 정당'(예를 들면 공산당) 존재 여부를 추가하여 프랑스를 '분극 다당제', 독일을 '온건 다당제' 국가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정당의 수에 따라 다당제 여부를 판단한다고 가정할 때 보통 기준이 되는 것은 독일의 비례의석 배분 진입 장벽인 5% 이상 정당 득표율이다. 결국 사르토리의 엄격한 적실성 기준과 5% 정당 지지율 기준을 다 고려한다 하더라도 독일을 양당 구도로 파악하는 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인 판단이다.
독일을 양당 구도라고 착각하는 이인영은 "선거제도의 변화가 반드시 다당 구도로 나아가는 것만은 아니"며 심지어 "과학적이지 않은 견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듀베르제(Duverger)의 법칙'에 따르면 단순 다수제는 양당제로 비례 대표제는 다당제로 이끄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강원택, 『한국의 정치개혁과 민주주의』 제1장, 인간사랑) 그리고 혼합형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는 독일은 다당제를 넘어 정당이 난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당 득표율 5%라는 봉쇄조항까지 두고 있다.
이인영이 예로 든 독일의 사례를 검토하더라도 비례 대표제가 확대되면 자연스레 다당제 구조가 정착된다. 하지만 다당제를 비판하고 싶은 의욕이 지나쳐 객관적인 사실마저 무시하고 양당 구도를 옹호하는 것이 과연 과학적 방법인지 묻고 싶다.
세 번째로 이인영은 17대 국회에서 나타난 양당 구도를 "민주화 개혁투쟁의 성과"라고 크게 착각하고 있다. 우선 17대 국회를 양당 구도라고 판단하는 근거나 기준을, 독일의 경우처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추측해 보자면 민주노동당과 민주당 둘 다 20석 미만으로 원내 교섭단체를 만들지 못한 반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양당만 교섭단체를 구성했기 때문에 17대 국회를 서슴없이 양당 구도라고 부르는 것 같다.
민주당 손봉숙 의원은 우리나라의 원내 교섭단체 조건이 다수당 중심의 정치 구도를 정착시키고 있다고 비판한다. 손봉숙은 "우리 국회의 교섭단체 구성 요건은 전체 의석의 6.7%로 프랑스의 3.5%나 독일의 5% 보다도 까다로우며 미국과 영국에는 아예 교섭단체가 없고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는 1석만 있어도 교섭단체가 된다"고 지적한다. 민노당의 심상정 의원은 심지어 교섭단체를 국회 위에 군림하는 괴물이라고 비난한다.
교섭단체 구성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기준을 따른다 하더라도 아래 표를 보면 1987년 민주 항쟁 이후 치뤄진 총선에서 현 17대 국회를 제외하고 13대국회부터 16대 국회까지 세개 정당 이상이 모두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함으로써 우리나라 정당체제가 양당 구도가 아니라 지역에 기반을 둔 다당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16대 국회에서 이른바 '의원 꿔주기'로 자민련도 교섭단체 구성)
무엇보다 열린우리당은 과반수를 차지하고도 위상에 걸맞는 정치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그리고 과반수 의석마저 상실한 지금, 사학법을 비롯한 개혁 법안과 선거구제 개편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라도 민노, 민주 양당과 협력할 수밖에 얺다. 그렇다면 상술(上述)한 사르토리의 적실성 기준 중에 법률안 통과를 거부할 수 있는 협박 가능성 기준으로 보면 캐스팅 보드를 행사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은 분명히 적실성 있는 정당이다. 또 정당 지지율 5% 기준에 따르더라도 13%를 득표한 민주노동당과 7%를 득표한 민주당을 포함하면 17대 국회는 양당 구도가 아니라 4당 구도다.
[역대 총선(13대~17대) 결과 비교표]
|
정 당 |
득표율 |
의석수 |
13대 총선 (1988년)
|
민주정의당
|
33.9%
|
125
|
통일민주당
|
23.8%
|
59
|
평화민주당
|
19.3%
|
70
|
신민주공화당
|
15.6%
|
35
|
14대 총선 (1992년)
|
민주자유당
|
38.5%
|
149
|
민주당
|
29.2%
|
97
|
통일국민당
|
17.4%
|
31
|
15대 총선 (1996년)
|
신한국당
|
34.5%
|
139
|
새정치국민회의
|
25.3%
|
79
|
자유민주연합
|
16.2%
|
50
|
통합민주당
|
11.2%
|
15
|
16대 총선 (2000년)
|
한나라당
|
38.9%
|
133
|
새천년민주당
|
35.8%
|
115
|
자유민주연합
|
9.8%
|
17
|
17대 총선 (2004년)
|
열린우리당
|
38.3%
|
152
|
한나라당
|
35.8%
|
121
|
민주노동당
|
13.1%
|
10
|
민주당
|
7.1%
|
9
|
탄핵 이슈에 집중했던 17대 총선을 과거 총선과 비교해 보면 두 가지 점에서 무척 예외적인 결과을 보여 준다. 먼저 87년 민주 항쟁 이후 5차례 치뤄진 총선에서 최초로 여당이 과반수를 획득했다. 13대 총선을 시작으로 16대 총선까지 그 결과는 모두 여소야대였다. 위 표를 보면 알겠지만 영남에 기반을 둔 '수구' 정당은 이름만 바꿔 가며 13대 국회에서 16대 국회까지 어김없이 제1당을 차지했다. 그러나 지역으로 나뉘는 다당제 구도하에서 절대 인구수에서 앞서는 영남 기반 정당이 제1당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당연한 결과를 뒤집고 17대 총선에서는 비영남 '민주' 정당이 대한민국 건국이래 최초로 제1당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인영은 17대 총선 결과를 "민주화 개혁 투쟁의 성과"로 오판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17대 국회에서 단독 과반수 제1당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인영도 인정하듯이 "탄핵이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건을 거치면서 국민들의 공분과 심판" 때문이지 솔직히 민주화 개혁 투쟁의 성과라고 볼 수 없다. 노회찬이 아프게 지적한 것처럼 열린우리당은 순전히 탄핵 덕분에 과반수 의석이라는 지갑을 주운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열린우리당이 17대 총선이라는 예외적 결과로 선거구제 시뮬레이션을 하는 것은 자위행위와 다를 바 없다. 차라리 새천년 민주당이 제2당으로 판가름 난 16대 총선 결과를 모의실험에 투입한다면 그나마 근사치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탄핵같은 폭발적인 이슈 없이 현행 선거 제도로 18대 총선을 치른다면 기존처럼 지역 구도에 기반을 둔 다당제로 복원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므로 지역주의가 "10년 전 보다 확실히 엷어"졌다는 이인영의 판단은 그저 착시 현상에 불과하다. 오죽하면 노무현 대통령이 영남 출신인 자신을 마약에 비유했겠는가?
마지막으로 이인영은 선거제도를 바꾼다고 지역구도가 크게 완화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낙관이나 낭만이라고 냉소하면서 "다당 구조는 양강 구도하의 지역주의보다 더 극심한 지역주의를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백번 양보해서 17대 국회가 양당 구도라고 하더라도 이는 탄핵의 결과일 뿐이며 13대부터 16대까지 치뤄진 총선 결과는 우리나라 정당 구조가 지역에 뿌리를 둔 다당제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하지만 비례대표를 대폭 확대하는 방식으로 선거제도가 개편된다면 지역주의를 충분히 완화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예를 들어 부산에 지역구를 둔 박형준처럼 개혁 마인드를 가진 의원에게 열린우리당이 비례 대표를 보장해 준다면 박형준이 굳이 한나라당에 목 맬 이유는 없다.
문제의 핵심은 특정 지역이 인물, 자금, 이슈 등 모든 선거 리소스를 독점하는 데 있다. 지역 대표는 줄이고 비례 대표는 늘려서 지역 독점을 깰 수만 있다면 지역 구도를 해소할 수 있다. 한나라당 박형준 의원과 반대로 전북에 지역구를 두고 있는 열린우리당 강봉균 의원의 경우 같은 재정경제 위원회 소속인 한나라당 서초구 이혜훈 의원과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에서 크게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보수 정당의 정책위 의장을 역임하는 편이 차라리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민주노동당의 경우 17대 총선에서 얻은 정당 지지율로 의석수를 환산하면 무려 45석으로 지금보다 4배 이상 늘어난다. 그렇다면 꿀꿀함을 싫어하는 유시민을 빼고 고진화나 임종인같은 개혁적 의원이 민노당으로 가지 말라는 법도 없다. 또 민노당을 떠난 윤종훈 회계사 같은 정책 참모들이 다시 민노당으로 몰리고 정당 보조금과 후원금이 훨씬 늘어난다면 확보된 인물과 자금을 바탕으로 정교한 정책 이슈를 개발해서 다시 의석수를 늘리는 선순환 구조를 창출할 수 있다. 결국 비례대표 확대는 지역구도 기반의 한국 정치 지형을 보혁구도로 전환시킬 가능성이 무척 크다.
물론 이인영의 우려처럼 거대 지역주의 정당이 쪼개져 현재 민주당이나 중부권 신당처럼 소(小) 지역주의 정당이 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중식처럼 지역 정당에 목 매는 경우를 제외하고 김효석이나 이낙연 같은 합리적인 인물이 비례대표로 선출될 수 있다면 굳이 민주당에 얽매이려고 할까?
비례대표가 대폭 늘어난다면 듀베르제의 법칙대로 지금보다 더 많은 정당이 출현할 것이다. 아마 비례대표가 확대되는 만큼 현재 정당 득표율 3%로 되어 있는 봉쇄 조항을 독일처럼 5%로 높여서 정당 난립을 막을 필요가 생길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다당제 아래에서는 양당제처럼 한 정당이 단독 과반수를 차지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연정이 일상 정치 행태가 될 것이다. 따라서 집권 과반수 연합을 획득하기 위해 연정의 룰(rule)과 문화를 본격적으로 배워 나가야 한다. '따로 또 같이' 갈 수 있다면 지금처럼 '같이 또 따로' 싸우며 붙어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
ⓒ즐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