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의 16대 총선이 기억납니다. 해양수산부 장관도 하고, 종로에서 국회의원도 하며 이제서야 좀 팔자가 펴는 듯 싶던 그 사람은, 아무 미련 없이 표표히 부산으로 내려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질 수가 없는 경력에 인물이었는데, 그 사람은 ‘이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하면 호남에 종살이를 하게 될 것’이라며 저열한 협박성 유세를 펼친 정치 신인에게 큰 표차로 패배했습니다.
그날 밤 저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처럼 그를 사랑하게 된 수많은 사람들 중 저와는 달리 문재가 탁발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울분이 소낙비처럼 쏟아진다’고.
2002년에 그 사람은 승산이 1%도 안되어 보이는 대통령 선거에 나섰습니다. 그 해에 대학 졸업반이었던 저는, 제 코가 석자인 주제를 망각하고 노랑 풍선에 돼지 저금통 달랑거리며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소녀처럼 나다녔습니다.
거의 꼬박 한 해 동안을 울다가, 웃다가, 화를 내다가, 꾹꾹 참다가, 또 울다가, 웃다가......
2002년의 12월 20일 새벽 국립 현충원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그 사람이 참배하는 모습을 볼 땐, 정말 가슴이 벅차올라 터져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천지가 개벽하여 세상의 만물이 응당 제 자리를 찾고, 정의가 물결처럼 흐르고 평화가 만개하며 약동하는 번영이 펼쳐질 것이라는........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없는 기대를 했었습니다.
‘나 노사모야’ 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내 안의 자기검열 센서가 조금씩 팍팍해져갔던 참여정부 5년간의 사건을 일일이 다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모든 굵직한 사건들에서 저는 그 사람이 좀 더 영악하고 뻔뻔해지기를 바랐지만, 그 사람은 정말 ‘바보’같아서 늘 안쓰럽기만 했습니다.
그 사람은 항상 맨몸이었습니다. 맨 처음에 그에게 닥친 시험은 대북송금 특검법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대북송금을 사법권 밖의 ‘통치행위’로 인정하고 자신의 모태(母胎)를 보듬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이 그 자체로 목적의 정당성마저 오염시킨다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기어이 특검을 수용함으로써 ‘호남’이라는 보호막을 걷어버렸으며, 향후 자신이 비슷한 ‘통치행위’를 행할 가능성마저 스스로 막아버렸습니다. 방패와 칼을 동시에 던져내고 어쩌려나 걱정이 앞섰습니다.
대선 자금 문제가 나왔습니다. 저는 피 냄새 물씬나는 정치보복을 희망했습니다. 청와대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검찰과 경찰, 국정원과 국세청을 동원해서 다 파헤쳐버리길 원했습니다. ‘차떼기’이야기가 나왔을 때, ‘5공+YS=파시즘+무능+부패’ 라는 심플한 방정식이 완성된 것 같아 기뻤습니다. 저는 정말 간절히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한나라당이라는 좀비가 재가 되어 완전히 소멸하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되려 자기 팔 다리를 하나 둘 잘라내기 시작했습니다. 명색이 국가원수가 되어 평검사들과 토론회를 하더니만, 홀연히 검찰조직을 정치권력으로부터 중립화시켰습니다. 국정원의 국내정치 사찰도 없애버리고, 비선 조직도 뭉개버렸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정대철과 안희정, 강금원 충직한 아군들이 유탄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고, ‘한나라당 대선자금의 1/10’ 액수를 넘어간 그의 대선자금은 ‘도덕성’이라는 그가 지닌 동급 최강의 쉴드에 생채기를 냈습니다. 지극히 수세적이었던 ‘1/10’ 레토릭이 보수 언론들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는 읍습함 속에서 정작 한나라당은 살아남았습니다. 자신의 권력기반을 하나씩하나씩 훌렁훌렁 내던져버리는 그의 탈권위주의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정권 취임 초기에 자신의 대선자금을 스스로 까발리는, 듣도 보도 못한 그의 청렴함과 솔직함이 저는 짜증스러웠습니다.
급기야 그는 민주당을 깨버렸습니다. 한 줌도 안되는 의원수를 가지고 전국정당을 만들겠다며 자신의 마지막 남은 베이스캠프를 날려버렸습니다. 안그래도 서운해하던 호남을 완전히 멀어지게 만들어버렸습니다. 허허벌판에 맨몸으로 섰던 그는 결국 포위되어 헌정사상 초유의 탄핵소추를 받은 대통령이 되어버립니다. ‘정말 어쩌려고 저러나....정말 어쩌려고....’ 저는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언론들은 ‘뺄셈의 정치’라며 그를 조롱했습니다. 지역주의 타파와 한국정치 혁신을 위한 그의 열정과 신념이 너무나도 야속하고 원망스러웠지만, 이런 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정말 너무나도 멋지게 지역을 벗어난 전국정당을 만들어내 버렸습니다.
덧셈 뺄셈 밖에 모르던 기성 정치인과 언론에게 '제곱의 정치‘를 가르쳐주었던 그 순간을, 저는 지금도 벅찬 환희로 기억합니다. ’아 이제는 되었구나, 이제야말로 정말 무언가 이루어지겠구나‘ 하는 기대감에 두근거렸던 나날들이었습니다.
언론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가 언론을 길들이기를 바랐습니다. 적당히 술 사주고, 기사거리 던져주고, 광고 밀어주고 하다가 당근이 떨어지면 국세청 세무조사와 국정원 사찰로 으름장 놓으면서 막 다그치길 원했습니다. 사실 저는 언론의 자유가 문서상으로만 존재하던 군사독재 시절, 그들이 보여줬던 정권에 대한 아양과 살랑거림이 그리웠습니다. 표현 하나, 행동 하나를 꼬투리 잡아 국가원수를 시정잡배 취급하면서 ‘할 말은 하는 신문’이라고 떵떵거리는 행태가 아니꼬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정치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언론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는 권력’이라는 포지션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면서 정면승부만을 고집했습니다. 콧방귀도 뀌지 않을 정정보도 신청과 명예훼손소송이 그가 선택한 무기였습니다. 언론시장의 70%를 장악하고 ‘그들이 쓰는대로 여론이 되는’ 대한민국에 살면서 그는 고집스럽게 언론과 맞섰습니다. 5년 내내 저주에 가까운 왜곡과 얼음장 같은 냉소가 국민들을 세뇌시켜 갔지만, 그 사람은 단 한번도 ‘언론의 자유’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말하는 ‘언론의 자유’가 진정 ‘언론의 자유’인지, 아니면 ‘언론 사주의 자유’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아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국가대표 축구 경기에서 공이 골대에 맞아도 노무현 때문이라는데,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멀쩡한 경제를 다 죽은 것처럼 말해도, 국가원수를 ‘노씨’라 불러도 그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내가 페어플레이를 하면 상대방도 페어플레이를 할 것이라는 믿음.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 같던 그 우직한 믿음이 서글펐습니다.
행정수도 이전은 그의 핵심 대선공약이었습니다. 이미 박정희 대통령때부터 검토되던 사안이었습니다. 저는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제청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헌법 재판관들에게 이메일이나 전화 한통 넣길 바랬습니다. 그리고나서 ‘그 정도로 재판간섭이라고 하면 안된다’ 라고 말하길 바랬습니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 수도가 서울임은 관습헌법으로서 인정된다’는 듣도 보도 못한 헌법해석에도 불구하고 헌재의 판단을 존중한다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습니다.
5년 동안 하나씩 하나씩 자신의 갑옷과 무기를 스스로 내려놓았던 그 사람이 퇴임했을 땐 정말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맨몸이었습니다. 오히려 홀가분해 보였습니다. ‘야 기분좋다’ 퇴임하던 첫 날, 그 사람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2009년 5월 23일 오전 9시 30분. 스스로 절벽에서 뛰어내렸던 그 사람은 다시 오지 못할 곳으로 영영 가버렸습니다.
나는 아마도 이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제 한달이 다 되어 갑니다.
이제는 좀 추스르고 제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 여전히 참 힘이 듭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이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