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대북정책 기조를 바꾸겠다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나라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좀 혼란스럽습니다. 어디로 가겠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걸 바꾸겠다는 것인지도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대북정책은 한나라당과 다른 정당을 나누는 잣대였습니다. 한나라당 정체성의 상징이었다는 것입니다. 실제 그것으로 꽤 이득을 보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참여정부는 피멍이 들었지만 말입니다. 그걸 바꾼다는 것인데 그 무게에 맞는 절차와 과정은 보이지 않습니다. 의견 수렴도 내부 토론도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의심스럽습니다. 진심이 담긴 것인지 말입니다.
생각은 바뀔 수 있습니다. 정책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걸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정책에 오류가 있어서 바꾸는 것이라면 그간의 오류에 대해 반성문 한 장 정도는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괴롭혔던 사람들에 대한 사과와 참회도 있어야겠지요. 시대와 상황이 바뀌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청산해야 할 낡은 시대의 대북관은 무엇이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대북정책은 무엇인지를 낱낱이 국민들에게 밝혀야 합니다. 정체성이란 정체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정체를 밝히십시오.
대북정책은 한나라당 정체성의 상징, 바꾸려면 합리적 설명 있어야
기억하십니까. 참여정부의 포용정책에 대해 그간 한나라당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말입니다. 비판을 넘어 저주와 악담이었습니다. “국민의 세금값을 못했다”(대변인 브리핑, 06.6.7)“대북정책은 북핵 포용정책”(김형오 원내대표, 06.10.9). “노무현 정권의 저자세적인 포용정책이 핵폭탄과 간첩으로 되돌아왔다”(박진의원, 국회통외통위 발언, 06.10.30) “노무현 정부가 대한민국의 정부로서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는 외교 망나니짓, 국제 망종의 짓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김형오 원내대표 최고위원회의 발언, 06.11.9) “노무현 정권만 아직도 김정일의 친구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강재섭 대표 최고위원회 발언, 10월 9일) 등 막말과 욕설 수준의 비난이 쉴새없이 이어졌습니다.
대통령에 대한 공격도 원색적이었습니다. “미국에는 맞짱뜨겠다면서 북한에는 왜 말도 제대로 못하느냐. 대통령이 석고대죄하는 마음으로 사죄하라”(이방호의원 국회 본회의 질의, 06년 10.10) “대통령은 한마디로 북핵 관리에 실패한 장본인이고, 평화를 관리할 능력도 대비책도 없는 사람” “노 대통령은 북한정권 감싸기에 바빴다. 핵위협 과장이나, 군사력 균형은 유지된다느니, 어처구니없는 말을 쏟아내는데 정말 대한민국 대통령이 맞는가”(강재섭 대표 국회교섭단체 연설, 06.11.10)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에 대해서도 ‘퍼주기’라며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재오 최고위원은 “우리들이 준 많은 돈들이 핵실험 자금이 되지 않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며 “북한에 그 어떤 이름으로라도 쌀 한톨, 물 한방울이라도 지원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강재섭 대표는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사업은 물론 대북 수해물자 지원 등을 포함한 모든 대북지원과 경제협력 교류를 중단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참여정부가 하면 석고대죄할 일, 한나라당이 하면 적극적 대북정책?
그렇게 저주에 가까운 공격을 했던 한나라당이 북핵문제가 풀릴 법 하니까 이제 와서 유연하고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말하고 있습니다. 강재섭 대표는 지난 15일 “유연하고도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펴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앞서 김형오 원내대표는 14일 “북한이 한나라당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북한에 대한 추파’라는 또 다른 오해를 낳을 수도 있는 발언입니다. ‘햇볕정책의 저격수’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정형근 의원은 평양 방문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듣기 민망합니다.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대북정책이 별로 바뀔게 없다는 얘기를 해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방북 방침이 ‘한나라당식 신포용정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참여정부가 포용을 얘기하면 ‘석고대죄’할 일이고, 한나라당이 하면 ‘유연하고 적극적인 정책’이 되는 것입니까. “쌀 한 톨 물 한 방울도 보내서는 안된다”던 사람들의 입에서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별로 바뀔게 없다”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올 수 있습니까. ‘별로 바꿀 게 없는’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왜 그토록 발목을 잡았습니까. 심지어 김대중 전 대통령의 특사자격 방북까지 막지 않았습니까.
박근혜 전 대표는 “정권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고 했습니다. 역시 유력한 경선주자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대북정책의 전면 수정”을 요구했습니다. 묻겠습니다. 이제는 분노를 느끼지도 않고 수정의 필요성도 없어졌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한반도 해빙기류에 편승하려는 무임승차 발상 버려야
얘기를 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맺힌 게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욕을 모욕으로 갚으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한반도에 불고 있는 해빙기류에 적당히 편승하려는 무임승차식 발상은 버려 달라고 주문하고 싶습니다. 평화는 도박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익을 따지는 장삿속으로 접근할 문제도 아닙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참여정부가 ‘폼나는’ 강경과 대결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비판과 모욕을 감수하는 화해와 협력의 험로를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분단의 구조에서, 평화의 길을 지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평화의 핵심은 공존의 지혜입니다. 적대하고, 의심하고, 자존심을 건드리고, 사사건건 시비를 따지는 대결주의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참기 힘든 것을 참아내야 하는 인내도 필요합니다.
한나라당의 대북기조 변화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전략적 변화인지, 전술적 변화인지도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많은 부분이 의문부호로 남아있습니다. 다만 궤도수정의 움직임이 있는 것만은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그 궤도가 평화의 길로 뻗어가는 것이길 바랄 뿐입니다. 힘든 길입니다. 강경과 대결의 체질을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위기, 긴장, 비상, 결단 등 폼나고, 멋있어 보이는 말도 하기 힘들어 집니다. 우군이라고 생각했던 몇몇 언론의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상당한 비난을 각오해야겠지요.
한나라당의 궤도수정, 평화의 길로 뻗어가는 것이길…
쿠바 미사일사태가 파국을 모면한 직후인 1963년의 일입니다. 당시 미국사회는 미-소 충돌이 현실화 될 수 있다는 우려와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이 가능하다는 두 가지 흐름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와 비슷한 상황이지요.
이 때 케네디 대통령이 아메리카대학 졸업식에서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대결적 사고에 젖어있는 미국 국민들에 대해 평화와 그리고 적대적 관계인 소련에 대한 새롭고 현실적인 인식을 촉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들 중 상당수가 평화가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위험하고 패배주의적인 생각입니다. 그것은 전쟁이 불가피하고, 인류는 불운하며, 제어할 수 없는 힘에 잡혀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문제는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두 나라는 모두 한쪽의 의혹이 다른 쪽의 의혹을 키우는, 또한 새로운 무기가 이에 대항하는 또 다른 새로운 무기를 만들도록 하는 악순환에 매여 있습니다.…우리 자신의 긴요한 이익을 지키면서 핵보유국들이 상대방을 굴욕적 후퇴 아니면 핵전쟁 중 양자택일 하도록 몰고가는 구도는 피해야 할 것입니다. 핵시대에 그러한 방향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 정책이 파탄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거나 세계의 집단적 멸망을 바라는 것과 다름없을 것입니다.…파멸의 전략이 아닌 평화의 전략이 우리가 향하는 길입니다”
40여년이 훨씬 지난 옛날의 얘기지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우리와 대단히 비슷한 상황에서 케네디 대통령이, 그리고 미국이 선택한 길입니다. 한나라당의 새로운 선택에도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