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보통 나이가 들면 보수화된다고 이야기한다. 삶의 여러 질곡을 거치며, 깍이고 다듬어져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지킬게 많은 보수의 탈을 쓰게 된다는 말이다. 선거때만 되면 노인층과 젊은층의 투표성향과 투표율에 따른 선거변수로서의 메카니즘을 분석하는 것이 통설로 자리잡고 있다. 과연 우리 인간은 나이가 들 수록 보수화 되는 것인가? 이것은 과연 인류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 성향인가? 2009년 6월 3일 서울대학교 교수들의 시국선언 현장에서 일어난 '애국노인'들의 항거를 보며, 다시금 이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 본다.
현재 노인층이라 불리우는 분들은 대체로 1940년대 태어나신 분들이다. 1940년대는 오늘의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모든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현상들의 숙주가 태어난 격동의 시대였다. 40년대 초에는 식민이 종국에 치닫고 있었으며, 중반에 와서는 외세에 의한 해방이 있었고, 동시에 냉전이라는 강대국들의 정치놀음의 한 가운데서 민족 자주의 기회를 상실하던 시기였다. 후반에 이르는 동안은 본격화되는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좌우의 날까로운 대결속에 분단이라는 오욕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러한 격변의 기운을 온 몸으로 겪었을 부모님들에서 태어난 분들이 오늘 현재의 노인들이다. 이 분들의 부모들은 현대사의 격변속에 식민의 설움과 냉전의 공포, 그리고 가난과 굶주림의 고통을 온 몸으로 맞으며 살아가던 사람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노인들의 전근대적 정치행동의 근원을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그것은 바로 적대적, 인류사에 있어 드물게 나타난 냉전이라는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적대감과 공포가 그들의 태교를 온통 혼돈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늙기 전에 이미 정서의 심연에 퇴행적 정치의식의 열매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의 성장기는 어떠한가. 50년대 이들이 아장아장 걸음을 달리기의 수준으로 발전시키던 시기에 한반도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든다. 해방이후 계속되던 좌우 내전의 양상이 확대되어 급기야 세계 열강의 폭탄이 난무하는 냉전의 전초전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노인들의 정서 발달에 가장 중요한 시기에 폭탄 소리와 학살이 난무하는 공포라는 것을 인생의 숙명처럼 떠안게 된다. 공산당의 "공"자만 들어도 기겁을 하는 원초적 공포심. 모든 사물을 적군과 아군으로 보는 습성이 싹트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피아식별만이 살길을 열어 주는, 내 편과 다른 군복을 입은 것들은 오로지 죽어야할 원수가 되는 전쟁은 이들에게 아직도 피아식별의 동물적 본능과 다른 것에 대한 두려움을 불치의 의식세계로 이들의 뇌리에 새기고 말았다.
이러한 역사가 결국 이들이 수많은 개성과 의견,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공존하는 다원화된 민주사회의 일원이 되는 일을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렸다. 여기서 끝났으면 그나마 좋으련만, 전쟁은 끝나지 않고, 멈추는 상태로 휴식에 들어간다. 끝나지 않은 전쟁의 휴식속에 이네들의 50년대는 이제 본격적으로 강대국의 힘을 발판으로 한 본격적인 냉전속 체제 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맘에 안들면 공산당으로 부르고, 먼저 공산당이라 지목한 이에게 하느님의 권능보다 더 무서운 생사여탈의 권한이 주어지는 어두운 시대가 열리게 된다. 오늘날 노인층의 퇴행적 정치의식의 본질적 근원은 바로 전후 남한 사회를 지배한 이승만 친일 친미독재정치에서 시작된다. 민주주의를 국시로 한 헌법에 의해 선거가 치뤄지고, 의회가 만들어 지는 등 실패한 왕조의 절대왕정과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의 폭력통치가 이제는 우리 역사에 경험해 보지 못한 공화국의 시대로 접어 드는 듯 했다(형식적으로 나마).
그러나 이승만은 하버드 교수 출신 답지 않게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용감한게도 왕조시대의 권위주의와 식민시절의 폭력 통치를 그대로 답습하여, 그야말로 역사에 다시 올 수 없는 민주공화국 건설의 기회를 잔혹하게 망가뜨리고 만다. 비록 분단이라는 역사의 비극속에서 일말의 희망적 역사를 만들 기회를 무참히 짖밟아 버린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우리네 노인들은 한번도 국가의 주인, 역사의 주체로 서보지 못한 부모세대의 왕조시대 백성의식, 식민시대 신민의식을 고스란히 물려맞게 된다. 현재 노인들게게 이승만은 헌법에 의해 주인된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아니라, 왕조시대 1년 농사의 가장 알찬 결실을 공출해 가던 조선시대 임금으로 자리매김해 버린 것이다.
결국 이승만의 야욕은 신지식으로 무장한 학생층과 이들을 선비로 예를 다해 존중하던, 가일층 성숙한 반백성, 반국민들의 저항으로 무너져 내리게 된다. 다행히, 4.19라는 변혁의 경험은 유년기 왕조시대로의 급속한 퇴행을 겪었을 오늘날의 노인들의 의식을 국민이 되는 길로 안내하는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게 격동과 아픔의 50년대는 초반의 중반의 전쟁과 독재의 어둠을 딛고, 일말의 희망을 만든 채 60년대로 가게 된다.
노인들에게 60년대는 이제 장성한 성인으로 노동과 정치 참여가 가능한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4.19 의거를 통해 획득한 자유 공간은 우리 역사를 새롭게 창조해 나가는 듯 했다. 역사속에서 단 한번도 주인이 되 보지 못한 백성들이 주인 노릇하는 국민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확신이 사회전반에 넘쳐 났다. 거의 5000년 묵은 수많은 이해관계와 사회모순이 동시다발로 폭발하던 시기이다. 그러나 또 한번의 비극은 시작되고 만다. 5000년 동안 잠복했던 문제들이 터져 나오니 시끄럽기는 했겠지만, 그것이 우리 역사를 새롭게 써 나가는 출산의 고통이라는 비교적 상식적인 사실을 모르는 군부의 친일 잔당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일당들이다. 그들은 비로서 공화국의 국민으로 역사상 최초로 등극하려는 이 땅의 청년과 노인, 여성, 학생 모두를 다시 구시대의 백성으로 일거에 돌려버리고 만다. 총과 칼 그리고 탱크로 무장한 그들은, 전쟁의 포성속에 무기의 위력에 가족과 형제를 잃은 사람들을 또다시 공포로 무장하게끔 한다. 당시 청년학생층이던 오늘날 노인들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군부의 경제개발 계획에 동원되는 공역의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박정희의 가장 큰 죄악중 하나는 바로 국민으로 태어나려는 건강한 이들을, 자기결정권을 박탈당하고 임금의 행차에 머리를 땅바닥에 바짝 갔다 붙이던 '국민도 아닌 백성도 아닌' 기형적 인간으로 변형시켜 버린 것이다.
50년대 이승만이 주로 사용한 깡패의 주먹은 역시 박정희가 들고 나온 총과 탱크에는 터무니없이 순진한 무기였다. 완전 무장하고 모든 것을 제압한 박정희는 18년동안 조선 시대의 몇몇 왕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왕들 보다 더 오래동안, 왕들도 누려보지 못한 권능을 맛보게 된다. 조선 500년 동안 일어난 끔직한 정변과 사화보다 더 끔직한 살육과 사화가 창궐하는 그야말로 절대왕조 시대가 부활한 것이다. 4.19로 조금씩 찾아 가고, 만들어 가던 국민으로서의 삶과 의식은 군부의 철권앞에 유린당하고 만다. '장성, 국회의원, 재벌, 고급공무원, 장/차관' 이른바 '오적'들이 세도를 부리는 현대 왕조국가가 6,70년대를 주름잡게 된다. 이후 박정희의 후예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더 이상 말을 안해도 그 행태와 양식이 박정희의 복제이기에 길게 말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결론적으로, 우리 사회 많은 수의 노인들이 가지는 정치의식의 수구성은 '나이가 들면 너희도 알게 돼'라는 공식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역사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너무 편리하게 사회를 바라보다 보면, '나도 나이가 들면 보수화 되겠지' 라는 함정에 빠져 근본적으로 권력과 개인, 사회와 나의 긴장관계를 망각하고, 천부의 소중한 나를 한낫 사회의 파편으로 국가의 동원력으로 전락시키고 말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오늘을 사는 노인들은 안타갑게도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남은 인생을 국민으로 살 수 있는 의식을 박탈당하게 된다. 철저한 박탈이었다. 그것을 배우거나 알려하면 무차별적으로 잡아가고, 고문하고, 패가망신하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철저히 포기하지 않는 이상 개인이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금기가 되어 버린다. 본의 아니게 때를 잘못 태어나서 질곡의 현대사를 살아 온 우리 사회 노인층의 삶의 무게를 위로 하고 싶다. 그렇다고 그들이 보여주는, 아니 그들의 정서와 언어에 녹아들어 있는 왕조시대의 백성의식과 독재정권에 숨죽이던 개발의 소모품으로서의 비상식적 행태가지 위로 하고픈 맘은 추호도 없다. 내게 생각과 맘을 자를 수 있는 칼이 있다면, 가장 먼저 냉전을 살아온 노인들의 본능적 적대의식, 백성의식, 권위에 복무하는 비겁한 위선을 잘라 버리고 싶은 심경이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계승 발전시키고, 유전자 조작하듯 더욱 고도화된 왕조시대는 식민 지절 이전의 왕조보다 그 생명력과 전염성이 엄청나서 세계 보편 가치로서 민주주의가 최우대 받고 있는 오늘날에 와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망각의 백성으로 살아가게끔 하고 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노인들의 유전자를 통해 자식에게로, 자식의 유전자로, 그 손자에게로 급속히 전이되어, 오늘 날 젊은 세대의 정치적 무관심과 정치주체로서의 주인의식이 망가지고 파괴되는 근원이 되고 있다. 정말 소름 끼치게 무서운 현상들이 우리사회에 벌어 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자로 시작해서 '박'자로 끝나는 사람이 부단히 이승만과 박정희의 발자국을 따라 성실히도 걷고 있기에 더욱 무서운 일이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이'자 '박'자를 다 소유한 사람 이구려)
끝 맺으려 하니,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온 사람이 과거에 '노인들은 투표하러 안가도 된다'고 한 말이 생각이 난다. 당시에 참으로 큰 평지풍파였다. 탄핵역풍에 의해 의회 전석을 석권할 기세를 단숨에 꺽어서 과반수를 넘기는 것에 만족하게 만든 핵발언이었다. 그런데 오늘 저녁 왠지 그 말이 옳은 말이라는 게 새삼스레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투표는 '백성'이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된 자들의 행사라는 만고불편의 진리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