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이 지난 월요일 선종하였다. 조의가 시작되기도 전인 오늘 새벽에도 수천의 시민들이 운집하여 차례를 기다렸다고 한다. 언 듯 본 TV 뉴스에 나온 조문 행렬 중에는 스님들도 있다. 생전 천주교가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 않고 존중하며 병존하고자 한 고인의 의지가 이런 모습을 자아냈다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위 개혁 진보적 시민들 일단에서는 그분에 대한 평가가 많이 인색한바 그분의 타계에도 다소 냉소적인 것 또한 현실이다. 필자는 천주교인인 관계로 그분의 선종을 맞아 이참에 김수환 추기경과 한국천주교회에 대한 짧은 생각을 밝혀보고자 한다.
1) 가톨릭교회의 보편적 보수성에 대한 회고
종교집단은 근본적으로 보수적이다. 교리가 추구하는 진리 그 자체나 진리의 전도 중에는 분명 자유와 진보 개혁적 요소 또한 존재하겠으나 종교 조직은 그와 별도로 짙은 보수색깔로 치장되어 있다.
사실 종교 조직의 보수성은 천주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다 그렇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천주교가 근 2000년의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보편성’과 ‘공통’을 내세우면서 어떤 의미에서 강제적인 통일성을 유지하는 조직관리 상의 ‘보수’적 태도 유지에 있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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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미사는 전 세계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비록 각국의 언어로 집전되기는 하지만 그 내용과 절차는 모두 동일하다. 사실 불과 수십 년 전, 필자가 꼬마일 때만해도 전 세계 모든 천주교회에서 거행된 미사는 모두 라틴어로 봉헌되었다.
이것이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정한 전례쇄신에 따라 모국어 사용이 허용되어 미사전례의 토착화가 차차 이루어졌고 한국천주교회도 이에 맞춰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한국어로 미사가 집전되었던 것이다 |
위 네모 안에 미사의 예를 들었는데 이 ‘공통’이라 표현되는 ‘통일성’의 목적은 성경의 자의적 해석과 이에 따른 이단의 발생을 억제하고 ‘가르침’ 및 ‘진리’의 왜곡을 막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나 조직의 권위에 대한 방어와 유지를 위해서도 절대적인 수단이었는데 아무튼 이로 인한 내부의 체제 도전과 갈등도 또한 적지 않았다.
그 대표적 예가 중세 종교개혁이었으며 근세에서는 바티칸과 상당기간 일정한 갈등을 빚었던 해방신학이 있다. 해방신학은 서구 유럽과 다른, 라틴아메리카가 겪고 있는 사회적 가난과 정치적 혼란 속에 종교적 신앙을 정치적·서민적 일상사와 관련시킴으로써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를 돕고자 한 일단의 성직자와 신학자들의 움직임이었다.
해방신학은 억압받고 소외된 자들로 하여금 사회 불평등을 야기 시킨 사회·정치 구조를 깨닫게 하고, 변화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활동적인 참여를 고양시킨 것으로,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억제해 온 바티칸의 정책과 상당한 부분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2) 한국천주교회의 보수성을 부추긴 사건들
이런 가톨릭의 전통속의 보수성과 별도로 한국천주교회는 이 땅에 전래된 직후에 보다 보수성을 띄어야만 하는 여러 중대한 사건을 겪었다.
200 여 년 전 이 땅에 천주교가 전래될 때 당시 천주교(서학)는 개혁세력인 남인(南人)학자들에게 환영되고 연구됨으로써 실학운동에 자극을 주는 등 기존 체제를 대신할 진보적 학문이자 사회개혁의 한 방편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새로운 천제로서의 하느님의 존재 그리고 인류 평등론에 의한 반상제도의 타파가 당파싸움에 정략적으로 이용되면서 정약용이 유배되고 그의 형 정약종이 참수된, 1801년부터 시작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4차례에 걸쳐 1만 수천 명의 순교자를 낳은, 세계사 적으로도 전무후무한 대 참변이었다. 당시 국민수를 감안할 때 웬만한 전쟁의 희생자 못지않은 피해를 한국천주교회가 입은 것이다.
한국가톨릭교회의 당시 수장들 입장에서 이로 인한 조선왕조에 대한 원한이 적지 않을 것임은 너무도 자명한데 이것이 반동적으로 조선왕조를 무너트린 일제에 협력하는 한 이유가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 간만에 찾아온 몇 십년간의 평화가 깨질 것을 두려워하여 한국천주교회는 신권력(친일세력)에 코드를 맞추었던 것이다.
사실 도마 안중근처럼 독립운동가 중에 독실한 천주교인이 적지 않았고 1910년 이전, 경향신문을 발간하고 서구유럽의 사회 운동을 들여와 국내에 접목하여 국채보상운동 등 사회 계몽운동을 통한 국권회복에 나름 노력한 점 없지 않다.
한일합방 후에도 신자들에 의한 항일운동은 거세 3.1 운동, 6.10만세 운동에 주도적인 노력을 했고 윤예원 신부, 안학만 신부 등은 독립군 단체 등에 직접 가담하여 활동하는 등 평신도와 일부 성직자 및 수도자들은 개별차원에서 일제에 처절한 항거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경향신문이 폐간되고 서양 선교사들이 추방당하는 등 교회 탄압이 노골화되자 불과 몇 십 년 전의 조선왕조에 의한 탄압 공포가 되살아난 교회 상층부의, 일제부역을 통한 교회탄압회피노력은 결국 친일이란 과오를 천주교회가 역사적으로 범하게 한 요인이었다.
한국천주교회의 수난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일제 해방 후 공산당에 의해 지배를 받는 북한 당국의 종교말살 정책에 의거 1949년에 모든 천주교 성직자가 강제 투옥되고 6.25 전쟁 중의 공산치하에서 다시 한 번 극심한 탄압을 받아 많은 성직자, 수도자와 신자들이 살해되었다.
이 전쟁을 통해 남한의 천주교에서는 교회사 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그 어느 집단 못지않은 반공이데올로기가 자리 잡았고 이는 이후 반공을 국시로 내건 이승만, 박정희 정권에 대해 정서적 동의가 없지 않은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3) 군사독재 정권에서의 한국천주교회의 변화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다는 것이 로마가톨릭교회의 공식적 입장이며 이는 바티칸의 일관된 요구이기도 하다. 한국천주교회는 이런 자세로 한국전쟁 이후 국내정치와 일정한 선을 그어왔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들어선 장면내각의 수장인 장면 총리가 박정희의 군홧발을 피해 갈멜 수도원으로 피신했다가 끝내 정권을 내 줄때에도 천주교는 교회차원의 대응을 하지 않았다.
정치와 유리될 수 없는 사회를 정치와는 별개로 취급하고 거기에만 관심을 기울였던 천주교는 이 격변기에 특별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이 1968년 서울대교구장으로 승품되고 교황에 의해 최연소로 추기경에 임명되면서 양태가 조금씩 달라졌다.
정권에 의해 자행되는 문제 특히 인권 유린과 사회 불평등에 서서히 한국천주교회는 김수환 대주교를 통해 보다 정직한 목소리를 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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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대주교는 1968년 서울대교구장 취임식에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라고 말함으로써 교회쇄신과 현실참여의 원칙을 분명히 했다.
또한 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종교적인 양심으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교회는 정치적·사회적인 권력보다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근본적인 신념으로 삼아 사회와 인류 안에서 빛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종교적 현실 참여를 강조했다.
따라서 교회는 절대로 불의와 부정과 타협하는 교회 공동체가 아닌 인간 모두가 순수한 양심에 따라 내면의 회심으로써 사회정의를 실현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과도기의 혼란한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즉 물질만능주의의 현대 사회를 염려하여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비워 서로 밥이 되어주는 길이 인간회복의 길이며 민주화의 길임을 호소하여 사회 인사들을 각성시켰고 소외계층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다음 백과사전에서 발췌) |
이후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 철권 정치에 맞선 김수환 추기경에 의한 한국천주교회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광주 민주화 운동 학살 사건” 등 역사의 현장마다 정의와 민주 수호의 보루로 국민들에 각인되었고 특히 비공식 조직인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김수환 추기경의 양해 아래 사제로서의 그 한계를 딛고 정치 격변기에 주요한 역할을 하여 민주화에 결정적 기여를 해 옴으로서 천주교가 그 교세와 달리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 왔던 것이다.
교회의 장상으로 한국천주교회를 이끄는 와중에 발생한 일련의 이 대 사건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결단이 끼친 민주화의 공로는 그 어떤 이들보다 지대했다 할 것임을 아무도 부인치 못할 것이다.
(사실 김수환 추기경은 성품 자체가 보수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재 권력과 맞서 민주화에 앞장선 이면에는 당시 지근거리에서 비서신부로서 김 추기경을 보좌한 함세웅 신부의 보이지 않은 역할이 컸다 할 것이다.)
4) 국민의 정부 그리고 참여정부에서의 김수환 추기경과 한국천주교회
그러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주화의 완성을 정치권에 맡기면서 정치와 일정한 선을 그은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교회 상층부는 다시 보수화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특히 천주교가 일반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던 그 시기에 천주교에 거꾸로 수구정치인들의 유입이 급격히 늘었고 이들이 서울의 주요 부자동네 성당을 장악(?)하면서 이들의 입김이 교계 상층부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 할 것이다.
이런 바탕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이들 수구정치인들의 집요한 노력은 교회 상층부의 보수화로의 회귀에 일정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나아가 이들은 김수환 추기경을 끌어들여 그분의 영향력을 통한 정치적 득세를 위한 끊임없는 공작을 자행한바 상당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비리 구태의 전형이라 할 이회창씨를 위로하여 그와 한나라당의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는데 일조하였고, 그 이후 한나라당이 요구하는, 구미에 맞는 발언을 몇 차례 하면서 진보개혁진영 일단에서의 실망감이 끝내 김 추기경에 대한 비토로 까지 접어든 것이다다.
(그 당시에 필자도 너무나 실망하여 끝내 몇 년간 글을 써온 천주교 내부 커뮤니티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었고 이로 인해 그 곳에 한 동안 소동이 있어 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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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님. 안녕히 계십시오.
작성자 박** 작성일 2004-09-14 오전 1:49:40
추기경님.
과거 그 오랜 세월 속에 추기경님은 저에게 있어 희망이요 등불이었습니다.
추기경님이 계셨기에 천주교인으로서 늘 저는 자랑스러웠고
암울한 시기에 불의를 이겨내는 정의의 표상으로서 언제나 용기를 주셨었습니다.
세월은 속세의 모든 것을 제 자리에 놓아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속세의 모든 것은 언젠가 변하나 봅니다.
사물도...그리고 사람도...
그 어느 때 부턴가 추기경님이 그리도 낯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아는 추기경님이 아닌 전혀 처음 뵙는 추기경님처럼 말입니다.
이제 그 낯설움도 걷어내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제 뇌리에 추기경님을 지울 때가 되었나 봅니다.
지난날의 그 모든 기억도 지울 때가 되었습니다.
소중한 기억의 저편에 늘 추기경님은 계셨습니다만 이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그 무거운 짐을 서로 간에 벗어 낼 때가 되었나 봅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
저도 이제 추기경님께 지워드린 짐을 치우겠습니다.
그리고 추기경님을 잊겠습니다.
추기경님.
늘 건강하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 김수환 추기경님을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가슴 아린 밤에 박안드레아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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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김수환 추기경이 끼친 민주화 공로에 비해 이런 사건은 어쩌면 조그만 사건이라 볼 수도 있지만 그분에 대한 ‘완전한 기대’를 해온 일단의 개혁진영에서의 실망감은 더 이상 그분을 존경하지 않는 상황으로 까지 전이되어 개인적으로 마음이 무척 아프다.
(이 사건 이후 김 추기경이 신학생일 때 일제에 의해 징병되어 학도병으로서 남아시아 투입될 당시 찍은, 학도병 모습의 사진이 나돌면서 친일 주구로 폄훼되다 못해 그 분을 ‘독립군 때려잡은 김수환’으로 까지 허위 왜곡 폄훼되는 모습이 소위 개혁진영 게시판에 나도는 것을 보면서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 가슴이 아팠다. 아무리 봐도 그건 정말 아니다.)
5) 이명박 정부 그리고 한국천주교회
작년 중 촛불이 가장 활발히 타올랐던 8월15일의 다음 날인 8월 16일 새벽. 그 전날 한국은행 앞에서 색소 물대포 속에 진압전경들과 맞서다 연행되는 동료촛불들을 보며 그곳을 피해 속수무책 명동 거리를 배회하다 늘 촛불을 들던 KBS 앞으로 되돌아온 필자는 일단의 시민들과 그 새벽에 긴급회의를 하였다.
이미 촛불 시작 후 1800명 가까운 시민들이 집회시위법 위반으로 끌려 간 이 암울한 시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그 좌절감을 토로하며 향후에 어떤 노력을 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그 새벽 회의에서의 결론은 그 날 저녁 민주당사를 전격 점거하기로 한 것이다. 수많은 민중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2mb 정권에 맞서 몸으로 항거할 때 특히 당시 잡혀간 시민들을 위해 민변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수적 부족으로 발만 동동 구를 때 율사가 가득한 민주당이 그저 강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음에 대한 분노가 폭발 직전이라 그들의 당사를 점거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날 저녁 점거가 시도되기 직전 회의에서 이런저런 정황을 따져본 결과 민주당에 대한 그 나마의 기대조차도 무의미하고 가치 없다는 판단이 서면서 민주당사 점거계획은 철회 되었다.
그리고 그 일주일 후에 장소를 바꿔 김수환 추기경의 후임인 정진석 추기경이 거주 집무하는 서울대교구청을 몇 분의 시민들과 함께 ‘쳐 들어가’ 마당에 자리를 깔고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이유는 이런 시국에서 입을 닫고 있는 한국천구교회 장상에 대한 무언의 항의이며 교회 수장이 직접 시국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자 한 것이다.
그날 오전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전종훈 신부가 교회의 압력으로 안식년 발령을 받았다는 기사로 뒤숭숭한 차에 실행된 이 단식항의는 1주일 만에 끝냈는데 결과적으로 그 성과는 미미하여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 추기경 자체의 보수적 성향과 더불어 그 분을 둘러 싼 교회 상층부가 모두 상당한 보수성을 갖추고 있어 사실 작금의 한국천주교회는 오히려 민주화의 걸림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야말로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사회 약자들에 귀를 열지 못하는 교회. 지금 한국천주교회의 모습을 안타까이 바라보면서 선종한 김 추기경이 과거 군부독재 시절 그 가공할 폭력 앞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시민과 함께 민주화를 이뤄내던 그 모습이 오늘 더욱 그립다.
필자가 위에 옮겨 놓았듯, 당신의 전체 행적에서 작았다 할 최근 몇 년의 몇 마디 발언에 속상하여 교회 게시판에 당신을 잊겠다는 글 까지 쓴 평신도로서 그 글이 못내 필자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다.
하여 오늘 필자는 교회의 어른이자 한 때 이 땅의 등불이었던 당신께 죄송함을 표하며 그 옛날 이 나라 이 땅에 쏟은, 민주화를 위한 당신의 그 노력을 가슴에 다시 재 각인하며 한편 약한 자 그리고 소외된 자와 늘 함께 하려 했던 참 목자로서의 당신을 기억하려 한다.
감사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
작은 실망으로 가렸던 당신의 봉사와 희생을 다시 되새기겠습니다.
부디 저 세상에서도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간구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