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모으기 전에 장롱부터 사주시라”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사진)가 10월9일 말씀하셨다. “금고, 장롱 속 달러 내놓아야.” 금덩이도 아니고 갑자기 달러는 왜 내놓으시라고 저러시나 읽어보니, 이게 바로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국민적 애국심을 발휘하는 길’이란다. 아하. 그러니까 외환이 위기구나. 모처럼 한나라당이 외환위기를 인정하는구나? 살짝 기뻤다. 원래 대책은 잘못을 인정한 뒤에 온다. 그래서 문제를 드디어 알아채시고 뭔가 대책을 향해 나가시는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역시 이분들 주특기는 때린 골 또 때리고, 안 때린 골 골라 때리고, 뒤로 돌린 골 뒤통수 때리기다. 이젠 또 위기가 아니란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 가라사대 “지금의 외환위기는 위기 그 자체도 문제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위기라고 생각하는 심리가 더 문제”라나? 이럴 수가. 역시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한 입 갖고 두 말 하시는 걸 넘어서 한 자리에서 두 말하기 신공을 이리도 자연스레 펼치시다니. 평범하고 상식대로 사는 우리 같은 인간이 어찌 저리 ‘입이 서 말이라도 꿰매야 보배’란 생각이 퍼뜩 스치는, 놀라운 입담 신공을 감히 펼칠 수가 있겠나? 그러니까 ‘위기’ 아닌데, ‘위기’라고 생각하는 심리가 ‘위기’란 말씀인데, 그럼 요즘 폭등과 폭락을 동반하는 환율과 주식시장 상황이 ‘위기’ 아니고, ‘위스키’라도 된단 말씀이신가? 대통령을 받드시는 충정 어린 마음이야 알겠지만, 그렇다고 국민마저 2MB 용량으로 아시다니.
그러니까 앞말 뒷말 모조리 정리하자면 이렇다. 위기 아니니까,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국민적 애국심을 발휘하러 금고, 장롱 속 달러를 내놓아라? 그러니까 다시 정리하자면, 위기 아닌데 위기니 달러 내놓아라? 그것도 장롱이나 금고에 쟁여둔 달러? 아, 이러니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란 가사가 나오는 것이며,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논술 교육이 필요하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거기다 대통령은 “달러 사재기를 말아야 한다” 하시고, 정부 여당 대표는 “장롱, 금고 속 달러를 내놓아야 한다” 하시는데, 당최 누가 달러를 사재기하고, 장롱도 모자라 ‘금고’에 달러를 쌓아놓고 산다는 건지 궁금증만 모락모락이다. 다들 쟁여둘 달러는커녕 달러 빚이라도 내게 생긴 판에? 역시 이분들은 달라도 뭔가 다르시다. ‘장롱을 대하는 자세’부터 남다르시다. 남들이 모두 장롱에 이불을 넣어둘 때, 장롱에 달러를 쌓아두고 사시다니. 혹시 달러를 이불 삼아 덮고 사시나?
방금 안드로메다에서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 같은 소리, <베토벤 바이러스> 토벤이가 오케스트라 지휘하는 것 같은 소리를 진심이라고 이리 하시니, 너무 감탄한 서민이 이런 소릴 하는 거다. “장롱 속 달러 내놓으라니…. 장롱도 없다. 이분들아.” 물론 방법은 있다. 먼저 달러 넣어둘 장롱부터 사주시든가.
조은미 (오마이뉴스 기자)
시사인 57호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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