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인통신’의 벽은 예나 지금이나 낙서로 가득하다. ‘낙서’ 자체가 시다.
‘양말주’ 사건과 심야 단속의 추억
불쇼는 노래만 있는 게 아니었다. A씨와 B씨가 벌인 희대의 ‘양말주와 빤스주’ 사건은 바로 그 무렵에 터졌다.
어느 푹푹 찌는 여름날 저녁, A와 B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팽팽한 활시위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그들은 이미 얼큰한 상태였다. 탁자엔 막걸리가 한 주전자 놓였다. A가 먼저 자신의 고린내 나는 양말을 벗었다. 그러고는 막걸리 한 사발을 그 양말에 걸렀다. 그 다음 젖은 양말을 비틀어 짜니 검은 땟국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막걸리 잔은 금세 거무죽죽해졌다. A가 “자 이 술 한 잔 받으시라!”며 B에게 내민다. B는 “좋아, 내가 마다할쏘냐?”며 단숨에 마셔버린다.
이번엔 B차례. B는 바지를 훌훌 벗더니 와락 팬티마저 훌러덩 내린다. 그러고는 그 노란 뭐 묻은 사각팬티 한쪽을 묶더니 거칠게 막걸리 한 사발을 거른다. 역시 B도 팬티를 비틀어 몇 방울 남은 것까지 짜낸다. “옛다 이거나 처먹어라!” B가 씩씩거리며 말한다. “처먹으라니, 드십시오 그래야지!” A가 맞받아친다. “드시든가 처 먹든가, 어쨌든 들이키라우!” 결국 A가 눈을 질끈 감고 쭈욱~ 마신다. 주위에선 박수가 터져 나오고 낄낄 박장대소가 터진다. 정말 다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그렇게 천둥벌거숭이들이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한밤중에 지지고 볶고 생난리를 치는데 시통에 아무 일 없었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어느 날 무허가 심야영업으로 주인 한씨가 새벽 1시에 종로경찰서에 잡혀간 것이다. 한씨가 조사받고 나오니 새벽 3시. 시통은 알전구 환하게 켜진 채로 빈 술병만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정면 벽엔 “누님은 잡혀가고 우리는 술도 못 먹고 노태우만 욕하다 간다”는 낙서가 쓰여 있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외쳤다. “누님! 누님! 저 (박)상우예요. 누님 걱정돼서 여태 우리들 집에 못 갔어요. 괜찮아요?” 소설 쓰는 상우 일행이었다. 역시 그들은 가지 않고 걱정하고 있었다. 한씨는 눈물이 핑 돌았다. 며칠 후 법원에서 등기우편이 날아왔다. ‘식품위생법 위반’에 벌금 30만원.
시통 식구들도 종종 벌금을 먹었다. 화장실이 멀어 문 앞에 양동이를 놔뒀지만 그걸 죽어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담벼락이나 전봇대에 실례하다가 경범죄 위반으로 벌금을 먹었다. 할 말 없었다. 동료들은 그걸 보고 재밌어 죽겠다고 낄낄거렸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벌금 소식에 시통 식구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이두엽 서울커뮤니케이션 대표가 펄펄 뛰었다.
“개새끼들! 빈대 간을 내먹어도 유분수지! 누님 또 합시다. 내가 10만원 보태줄 테니…. 누가 이기나 해봅시다! 이 가난한 글쟁이들이, 계란프라이 해놓고 밤새 술 좀 먹기로서니, 불쌍한 누님 잡아다가, 벌금 매기다니…아이구 치사하다 치사해.”
“그럼! 그럼! 하모! 하모! 개새끼 닭새끼 쥐새끼 염소새끼 모기새끼 빈대새끼 개구리새끼… 또 없냐? 치사한 새끼들….” 술꾼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새끼에 새끼줄을 이어댔다.
“뭐? 시통이 벌금 먹었다고?” 이번엔 ‘핏대’가 유난히 많은 신문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신문사 노조원들은 아예 시통에서 회의를 하거나 회식을 했다.
넝쿨의 시인 김신용
‘집 앞, 언덕배기에 서 있는 감나무에 호박 한 덩이가 열렸다/ 언덕 밑 밭 둔덕에 심어놓았던 호박의 넝쿨이, 여름 내내 기어올라 가지에 매달아 놓은 것/ 잎이 무성할 때는 눈에 잘 띄지도 않더니/ 잎 지고 나니, 등걸에 끈질기게 뻗어 오른 넝쿨의 궤적이 힘줄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무거운 짐 지고 飛階를 오르느라 힘겨웠겠다.…(중략)…저 넝쿨/ 가을이 와, 자신은 마른 새끼줄처럼 쇠잔해져가면서도/ 그 끈질긴 집념의 집요한 포복으로, 불가능이라는 것의 등짝에/ 마치 달인 듯, 동그렇게 호박 한 덩이를 떠올려놓았을 것이다/ 오늘, 조심스레 사다리 놓고 올라가, 저 호박을 따리/ 오래도록 옹기그릇에 받쳐 방에 장식해두리, 저 기어가는 것들의 힘.’‘김신용 ‘도장골 시편-넝쿨의 힘’ 전문’
1988년 여름, 지게꾼 시인 김신용이 화가 박광호와 홀연히 시통에 나타났다. 그는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서 보도블록 깔던 일용노동자였다. 구두닦이 껌팔이 지게꾼 매혈 어부까지 안 해본 게 없었다. 그 후 그는 가끔 나타나서 노트에 깨알같이 쓴 시를 슬며시 내놓곤 멋쩍어 했다.
그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지만 단 한 번도 공짜 술을 먹지 않았다. 한두 잔이라도 얻어먹었다 싶으면, 그 다음 반드시 그 빚을 갚고야 말았다. 당시 그는 서울역 앞 양동에서 한달 12만원짜리 사글셋방에서 살았다. 첫 시집 ‘버려진 사람들’이 나왔을 땐 시통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축하했다. 모두들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그 시집은 시통 식구인 김선유 시인이 당시 고려원 편집장이던 최승호 시인에게 보여주어 이뤄졌다.
그는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하기 위해 인세 200만원으로 1년치 방세를 내고 연탄을 들였다. 그는 글 쓰는 게 평생 소원이라고 말했다. 비록 1년 동안이지만 공사판 갈 걱정이 없어졌다. 먹고살 걱정 없이 맘껏 시를 쓸 수 있었다. 그는 1년 동안 낮엔 공사판 대신 남산 도서관을 찾았다. 밥은 한 끼쯤으로 때우고 미친 듯이 시를 썼다.
김신용은 술이 얼큰하면 목에 걸친 수건을 풀어 색소폰 부는 흉내를 냈다. 한쪽은 입에 물고 다른 한쪽은 발로 밟고 그를 당겨 몸을 비틀었다. 그것은 마치 ‘집요한 포복으로, 불가능이라는 것의 등짝에, 달덩이 같은 호박 한 덩이를 올려놓은’ 호박넝쿨 같았다. 아! 그 끈질긴, 기어가는 것들의 힘이여!
‘이사 퍼포먼스’와 ‘색시’ 마광수의 출현
언젠가는 떠나야 했다. 더는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건물 관리인은 진저리를 쳤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이어지는 ‘심야 퍼포먼스’. 생쇼 불쇼에 난리 블루스…. 장안의 도깨비들이 벌이는 난장 된장 고추장 천장 마룻장 아수라장….
관리인은 “제발 떠나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또 시통 식구들이 나섰다. 순식간에 ‘시발연(시인통신발전연구회)’이 만들어졌다. 우선 단골 외상꾼들이 서둘러 외상값부터 갚았다. 화가들은 앞 다퉈 그림을 기증했다. 시인 소설가들은 원고료 일부를 떼어 내놓았다. 건축가는 새로 이사 가는 시통 내부 실내장식을 맡았다. 이렇게 300여 명으로부터 비록 적지만 소중한 성금이 모아졌다. 주인 한씨는 그동안 피같이 모은 돈과 일부 빚을 낸 목돈에 시발연의 성금을 보태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1992년 5월2일 밤. 시통 식구들이 한밤중 모두 나와 난데없는 ‘길거리 퍼포먼스’를 벌였다. 저마다 손엔 낙서판, 술잔, 나무의자, 접시, 잡지 사상계 등 온갖 잡동사니가 들려 있었다. 시통 이삿날이었다. 새 보금자리는 종로1가 농협과 무과수제과 뒤편(현 ‘르 메이르’ 자리). 1층만 무려 10평, 2층까지 합하면 20평이나 됐다. 하루아침에 오막살이에서 대궐 같은 집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건축가 이홍기는 건물 여기저기 비틀어지고 구멍 난 데를 말끔히 손질했다. 화가 강찬모는 한쪽 벽면을 멋들어진 그림으로 채웠다.
그해 10월 시통 식구들이 또다시 한데 모였다. 이번엔 서울 서초동 법원 청사 앞. 모두 입에 ‘×자가 그어진 마스크’를 썼다. 또 다른 시통 식구 마광수 교수를 위한 모임이었다. 마 교수는 소설 ‘즐거운 사라’로 인해 청하출판사 사장이면서 시인인 장석주와 함께 검찰에 구속된 상태였다. 죄명은 음란물 제작 배포 혐의. 그날 시통 식구들은 연세대 학생 20여 명, 청하출판사 사람들 등 50여 명과 함께 ‘표현자유 수호’를 외쳤다.
술좌석의 마 교수는 범생이 그 자체였다. 거의 말이 없었다. 어쩌다 우스개 말이 나오면 겨우 희미하게 웃었다. 일부러 누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였다. 늘 뭔가 긴장하고 있었다. 누군가 말했다.
“아이고 말도 말아요. 그 마 교수 완전 색시요, 색시. 언젠가 아가씨들과 악수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 데, 아 글쎄, 손이 파르르 떨리더라니까. 도대체 그런 마 교수가 왜 음란이니 뭐니 해서 유명하게 된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어느 날 감옥생활을 끝낸 마 교수가 다시 시통을 찾았다. 들어갈 때보다 오히려 밝고 더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동안 시통 식구들 덕택에 잘 지냈습니다. 고마워요. 나 거기서 많이 반성하고 공부했습니다.”
그는 노래도 불렀다.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를 걸어갈 때, 쇼윈도 글라스에 눈물이 고였다…” 그의 18번은 ‘명동 엘레지(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였다.
시통 식구들은 그를 따뜻하게 맞았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누군가 그에게 짓궂게 물었다. “마 교수, 지금도 손톱 뾰족한 여자와 긴 생머리에 뾰족구두 신은 여자를 보면 미칩니까?” 마 교수는 씩 한번 웃더니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이구, 이젠 자신 없어요, 무서워요.” 그 순간 “으하하하” 모두가 발을 구르며,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다.
시통의 3세대 주역들
시통은 넓어지면서 한결 넉넉해졌다. 땅거미 어스름 내려, 시통의 꽃등불이 켜지면 ‘어린애 같은 어른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하룻밤 많게는 120명 가까이 들끓었다. 100명 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시장바닥처럼 늘 시끌벅적 북적였다. 하지만 빈자리가 없다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서로 모르는 사이라도 자연스럽게 합석하고, 어느 순간 한식구가 돼버렸다. 그러다가 때론 싸우기도 하지만, 금세 어깨동무 하고, 노래 부르며 울먹였다.
시통은 어느새 3세대를 맞고 있었다. 초창기 출범할 때 문인 예술가들이 1세대였다면, 1984년 한씨가 새 주인으로 자리 잡을 무렵엔 지사적 주당들이 2세대 주역으로 등장했다. 농협 뒤로 이사한 후엔, 각 언론사 노조팀, 당시 막 뜨고 있던 신규 광고회사팀, 386운동권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들과 같이 왔던 샐러리맨들도 적잖이 합류했다. 바야흐로 세상은 휙휙 변하고 있었다.
시통에선 시낭송회와 출판기념회가 곧잘 열렸다. 각종 명목의 기념회 같은 것도 심심찮게 펼쳐졌다. 그즈음 산삼 심는 패거리인 ‘농심마니패’들이 시통을 아지트로 삼아 한세상을 희롱했다. 이들은 이산 저산을 누비며 어린 묘삼을 심고 다녔다. 나중에 누가 캐 먹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우리 백성 중 누군가가 캐먹을 것 아니냐는 거였다. 어느 땐 백두산까지 날아가서 삼을 심고 오기도 했다. 이들이 자나 깨나 부르는 노래는 ‘농심마니의 아침’이었다.
‘농심마니 잘 있느냐/ 지난 밤 꿈속에서/ 산신령이 하신 말씀 귓가에 새롭구나/ 산삼은 이 땅에 뿌리요 배달의 정기/ 조선은 삼산 밭 산삼을 심자./ 삼 심자 심봤다 이 나라 이 땅에/ 이 나라 이 땅에.’
|
 |
전국 술집 중에 ‘붓글씨’로 벽에 낙서를 한 곳은 ‘시통’뿐이리라. 대부분이 화가의 작품이다.
산악인 박인식(대장), 산처녀 남난희 김경희, 작곡가 한돌, 시인 김홍성, 소설가 최성각, 사진작가 황상보 안성일, 연극연출가 최유진, 번역가 이상영, 칠보공예가 물빛, 작곡가 변규백, 자연보호운동가 이덕용, 여행가 박세경, 치과의사 김윤만, 기자 이평식, 또 다른 모임 풍패의 김응하 박흥식 윤명철 등이 그 멤버였다. 하지만 여기에 김종철 논설위원, 재야 기호논리학자 신성준, 화가 서영준, 서울커뮤니케이션 대표 이두엽, 화가 박권수, 배우 이성룡, 치과의사 이승건, 시인 권경업, 영화감독 이만 이미례, 가수 이연실, 염색공예가 정윤숙, 장승조각가 신명덕 등이 시도 때도 없이 범벅이 되어 어우러졌다.
각 언론사 노조 팀들도 북적였다. 동아일보 김광원 위원장은 밤이 이슥해지면, 노조원들과 함께 몰려와 목을 축였다. 권영길 언노련 위원장도 단골 멤버였다. 그는 대단한 술꾼이었다. 아침이 부옇게 밝아올 때까지 마셔도,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후배들이 횡설수설에 버릇없는 말을 함부로 지껄여도 전혀 미동 없이 묵묵히 들었다. 말은 거의 없었지만, 남의 말 듣는 데는 천하도사였다. 결국 마지막 한 사람까지 코 박고 쓰러지면, 그때서야 조용히 일어났다.
권 위원장은 2002년 민노당 대통령후보로 나서 뜻있는 선전을 펼쳤다. 대선이 끝난 후, 그는 시통에서 그의 멤버들과 함께 대선 뒤풀이를 가졌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어느 언론사 후배가 말했다.
“만약 투표가 아닌 술로 했다면, 권 선배가 대통령 되는 건 식은 죽 먹기일 텐데….”
외상장부 들여다보고 후배 술값 갚아주는 선배도 많았다. 동아일보 이도성 기자는 ‘어느 편집부 후배 술값으로 쓰라’며 원고료를 통째로 맡겨놓곤 했다. 한국일보 김종우 기자도 가난한 후배들 술값 대느라 바빴다. 우먼센스 조대웅 국장은 후배술꾼의 적지 않은 외상값을 갚아주면서 “그 인간 술 먹으면 큰일 나요” 했다가도, 한두 잔 들어가면 “술꾼이 술을 못 마시면 어떡합니까? 다음엔 조금씩만 주세요. 내가 갚아줄게요”라고 말했다. 참으로 따뜻한 선배들이었다.
진짜 시인 된 ‘시통’ 주인장
시인 소설가 발길이 줄었다지만, 예술인들의 발길은 여전했다. 어느 날, 철학자 황필호 교수가 “아니 이런 곳에, 이런 묘한 데가 있었나?” 하며 나타났다. 구인환 교수의 안내로 시통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구 교수는 ‘낭만작가’이기도 했다. 흥이 나면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빼들고 멋들어진 춤을 추며 아리랑을 불렀다. “우리 집 시어머니는 야속도 하지, 그 잘난 것 하나 낳아줬다고 날 들들 볶네~” 이렇게 선창하면, 황 교수나 소설가 오인문 이동희 김정례 등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며 후렴을 불렀다. 곧바로 구 교수의 선창이 이어졌다. “우리집 서방님은 야속도 하지, 그 잘난 것 하나 갖고서 날 못 살게 구네~”
시인 노향림 박영하 장윤우, 문학평론가 신동한 윤병로, 소설가 윤후명 김병총 서종택 등도 이즈음 활발하게 시통을 드나들었다. 그중 하나였던 문학평론가 이명재는 당시 시통 분위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농협 뒤에 쪽문 열면 도심에 자리한 문인 사랑방이 있다. 1990년대 초 작가 구인환 선생, 오인문 사백과 우연히 들렀다가 알게 됐다. 시골주막집 분위기라 정겨웠다. 아늑한 문인사랑방에 온 듯한 안온감을 준다. 어둑신한 나무층계로 퉁퉁 소리 나는 발자국 따라 2층에 오르면, 완전히 동네 친구 집에 찾아온 기분이다. 퇴색된 천자문의 한지로 도배된, 벽 군데군데에 걸린 거친 묵화그림이며, 서투른 붓글씨로 쓰인 글귀들 역시 옛날 시골 주막 같은 정취를 자아낸다. 밤늦게까지 문학담과 정담들이 무르익다보면 실내 분위기도 달아오른다. 맞은편 직장인인 듯한 남녀 젊은이들이 우리 테이블로 두부김치 한 접시와 맥주 한두 병을 보내오기도 한다. 그리고 주인은 이날 우리 모임 모습을 찰칵 카메라에 담았다가 다음에 전해주곤 한다.”
 |
사진. 신석교
예전만 못하지만 화가들도 종종 나타났다. 200일 넘게 그림만 그리다가 갑자기 시통에 들러 몇날 며칠 술을 쏟아 붓는 화가도 있었다. 적색벽돌과 나무 문, 삐걱거리는 목조 고가. 목각으로 된 작은 간판. 마른 북어에 마요네즈, 마른 멸치 땅콩. 계란말이….
글쟁이들의 만취 강의는 여전했다. 그들의 언어는 남달랐다. 일상의 언어들을 걸러내어, 다시 구슬에 꿰어 내놓았다. 오가는 말마다 신선하고 반짝반짝 빛이 났다. 시통은 예술가들의 치열한 토론장이었다. 야전대학이나 마찬가지였다.
1993년 주인 한귀남씨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문학계간지 ‘포스트모던’에 시 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시인이 된 것이다. 시는 ‘나의 토방’ 등 4편. 시통에서 시인들과 10년 부대끼면서 얻은 선물이었다. 한씨는 “어느 날 ‘내가 썩어가는구나’하는 생각이 덜컥 들어, 노트에 끼적거리기 시작했는데, 이게 여기까지 올 줄 몰랐다”고 말했다. 시통의 시인 술꾼들이 한씨의 습작노트를 빼앗아 통째로 잡지사에 보낸 것이다. 한씨는 내친김에 2000년 계간지 ‘지구문학’에 소설 ‘피맛골에 부는 바람’이 실리면서 소설가로도 데뷔했다. 여고시절(서울 동명여고) 품은 문학의 꿈을 이룬 것이다.
시통 이사 10년째인 2002년 봄. 외상장부 명단이 1000여 명에 가까워졌다. 어느 시인은 “외상값 대신 시 2편 써줄 테니 아무 잡지사나 갖다 주고 원고료 받으라”며 껄껄댔다. 화가들은 그림 한두 점 그려서 슬며시 내밀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시통엔 김재곤 논설위원만 가끔 눈물을 흘리다가 가곤 했다. 꺼이꺼이 목 놓아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맛길도 뭉텅뭉텅 허리가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교보빌딩에서 이어지는 피맛길 두 번째 골목인 시통골목은 재개발에 들어갔다. 무과수 제과, 조방낙지, 만나회관, 부산뽈데기, 천냥집, 아산 한우방이 사라졌다. 2003년 겨울, 시통도 인사동으로 떠났다. 인사동 시통(2004~2005 겨울)은 ‘갓 쓰고 자전거 탄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젊은 층 분위기와 영 어울리지 못하고 뱅뱅 겉돌았다. 시통 식구들도 한두 번 가보곤 고개를 저었다.
2004년 11월 시통은 다시 청진동으로 돌아왔다. 청진동 해장국집(청진옥) 바로 뒷골목이었다. 그 골목은 교보빌딩으로부터 이어지는 피맛길 세 번째 골목이었다. 중국집 신승관, 한정식집 한일관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2008년 그곳도 재개발에 들어갔다. 2008년 7월31일 시인통신은 결국 문을 닫았다. 피맛길엔 더 이상 어디 발붙일 데가 없었다. ‘삐까번쩍’ 새로 올라간 건물은 집세가 엄청났다. 그걸 맞추기 위해선 술값이 카페 수준은 돼야 했다. 그건 시통 식구들에게 오지 마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피맛길은 원래 서민들의 길이다. 말을 타고 종로 큰길을 지나는 벼슬아치들을 피해(避馬) 다닌 길이다. 거들먹거리는 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기 싫었던 것이다. 1980년대는 최루탄을 피해 들어왔던 피연길(避煙路)이었다. 조선 후기엔 ‘팔뚝거리’라고도 불렸다. 이 부근에 살던 양반들이 먹고살기 위해 해장국 장사를 했는데, 그래도 양반 아녀자들이라 얼굴을 내놓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휘장 뒤에서 두 팔뚝만 내놓으면서 밥상을 내밀었다. 이후 ‘팔뚝거리, 팔뚝동네’라고 했다. 시통의 큰누나 한씨는 말한다.
그 많던 술꾼은 다 어디에…
“고난의 시기엔 예술가들이 유달리 더 가슴앓이를 한다. 지난 세월 그들을 옆에서 지켜보자니 나마저 껍데기가 열 번쯤은 벗겨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고통도 힘이었다. 그땐 누가 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지 다투다가, 끝내는 서로 부여잡고 울음을 터뜨린 격정의 시절이었다. 돈도 없던 추운 시절에 광기로 터질 듯한 남자들이 시통을 찾아왔다. 난 한번도 장사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들과 밥도 같이 먹고, 라면도 끓여주고 하면서, 식구처럼 그렇게 부대끼며 그 엄혹한 시절을 견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그 ‘시통 식구들’
|
▼ 시인 강경훈 강만식 강태열 권경업 권일송 김규동 김선유 김송배 김신용 김여옥 김영철 김정웅 김종천 김춘랑 김하중 김홍성 마종하 민영 박건삼 박경용 박중식 박태진 백옥실 서벌 송길자 송동권 송동호 송재룡 송재율 송현 신경림 신세훈 신순애 신현배 안도선 안만식 안익수 오영수 우영창 이규헌 이규호 이근배 이도윤 이상범 이생진 이수화 이승철 이용범 이창년 이탄 이태근 이형덕 임문혁 장윤우 전종목 전연욱 정공채 조재훈 조해인 지성찬 진복희 진을주 최승호 최정자 하득용 한분순 허유 허홍구 ▼ 소설가 구인환 김대수 김명조 김병총 김우영 김영현 김석태 김송배 김정례 마광수 박상우 송우혜 서해성 심명석 안장환 오인문 오성찬 엄광용 원형갑 유재용 윤후명 이동철 이동희 이세기 이완수 이원파 이외수 이정림 이호철 전범수 전상국 정건섭 정신재 정연희 정을병 조동수 조해인 최강록 천금성 표성흠 하성찬 하일지 하창수 ▼ 수필가 김시원 정목일 ▼ 문학평론가 신동한 이유식 윤병로 장백일 정신재 최동호 최학 ▼ 아동문학가 박홍근 이상교 신현득 신형건 ▼ 만화가 김 삼 한희작 ▼ 화가 강용대 강찬모 강행복 김문조 김영미 박광호 박권수 박상희 백경학 서영준 서정태 손상기 송 똥 심문섭 이목일 전강호 전수창 정복수 최낙경 ▼ 언론인 구본갑 국흥주 권영길 김광원 김동철 금동혁 김 성 김재곤 김종구 김종철 김중배 김지용 김지완 김태홍 김화성 김회평 문학진 박관일 박병서 안기석 엄광용 오광수 원용강 이관기 이도성 이세일 이승호 이점석 이평식 임형균 유보상 윤승용 손문상 신효정 정출도 천상기 최영록 황제연 허승호 ▼ 사진작가 김성수 김수영 이남수 안성일 조준호 황상보 ▼ 기타 재야논리학자 신성준, 산악인 박인식, 남난희, 작곡가 한돌, 전위예술가 무세중, 연극연출가 최유진, 연극인 이성룡, 영화감독 한옥희 이미례 이만, 서울커뮤니케이션 대표 이두엽, 방송작가 이은집, 철학박사 황필호, 장승조각가 김명덕, 치과의사 김윤만 이승건, 여행가 박세경, 작곡가 변규백, 자연보호운동가 이덕용, 번역가 김대웅 이상영, 가수 이연실, 염색공예가 정윤숙, 사람과 산 홍석하, 그래픽디자이너 이관열, 다큐멘터리 작가 홍하상, 극작가 유보상, 민속학자 심우성, 문학통신 이지룡, 추리작가 정건섭, 교사 안철상, 사업가 김명성 이상일, 자유기고가 공정희, 해냄출판사 송영석, 방송인 김경원, 출판인 이정한, 북한산 지킴이 차준엽, 원강스님, 산하출판사 소병훈, 건축업자 이홍기, 영화평론가 한옥희, 인도여행사 정윤숙, 우리말갈래사전 박용수, 교수 이길주 서상문, 옹기쟁이 김용문, 변호사 김광정 박원순 윤학, 여행가 송일봉, PD 표재순, 문학박사 신철균, 치과의사 김영환, 새마을문고 강만식, 영국신사 김갑석, 교보생명 민욱과 그 일행…. | |
연암 박지원은 1771년 서른네 살 때 과거를 때려치웠다. “선입관을 버려야 한다. 조선 사람의 눈으로 조선 사람에게 이로운 것을 보고 배워야 한다. 사나이 대장부가 닭벼슬보다 못한 벼슬 따위는 해서 뭐 하는가”라며 협객 백동수(1743~1816)를 길잡이로 삼아 전국을 떠돌았다. ‘책만 읽는 바보’ 이덕무(1741~1793), 이서구(1754~1825)도 함께했다. 이때 이덕무가 서른, 백동수가 스물여덟, 이서구가 불과 열일곱 살이었다. 이들은 개성 송도-평양-천마산-묘향산-속리산-가야산-충북 단양 등을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니며 꺼이꺼이 질펀하게 울 만한 곳을 찾았다.
“조선 천지엔 금강산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 동해바다를 바라보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고, 황해도 장연의 금 모래밭을 거닐면서 원 없이 울어볼 만하다”
1980년대 이후 시통을 수없이 들락거렸던, 그 열혈아들은 지금 다들 어디서 울고 있을까? 1987년 6월 그 뜨거웠던 여름, 광화문 일대에서 최루탄에 맞서 싸우다가, 밤 이슥해 시통에 들어서던, 그 자랑스러운 ‘해방전사’들은 앞으로 어디서 마음껏 울음을 터뜨릴까? 시통이 사라진 피맛길은 이제 ‘죽은 시인’의 골목이 되었다.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