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10시 30분. 푸르름이 더하는 5월 17일. 날짜에 맞추듯 17명의 대구 유티즌을 태운 버스가 사랑하는 여인의 옷고름같은 88고속도로에 얹혀졌다. 차창으로 달려들며 스쳐지나는 풀빛이 한껏 젊음을 뽐내다 못해 넘쳐 흐르는 끼를 감당할 수 없다는 듯 살랑이는 늦봄바람에 살짝 살짝 요염을 떤다. 점점이 박힌 마을의 정겨운 풍경이 아스라이 멀어졌던 추억을 일깨우며 오욕에 찌든 욕심을 버리라며 피곤하지 힘들지 위로하며 예쁘게 예쁘게 가슴에 안겨든다. 달구벌에서 빛고을이 뭐에 먼길이라고 지금껏 편가르기를 했냐며 꾸짖듯이 하늘을 비켜 지나는 솜털구름이 환한 웃음으로 반긴다.
산은 물을 건너고 물은 산을 가르지 않는다는 옛 시인의 말을 되뇌이며 금수산하에 취해 헐떡이며 달리다 백두대간의 대미를 장식하는 지리산 휴게소에 차를 멈추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늠름하게 우뚝 서고, 스러져 사그라들지 않고 지금도 살아 벌떡 벌떡 뛰는 민초들의 역동적인 열정이 염상진 하대치 더불어 화들짝 펼쳐진다. 휴게소에서 잠시 쉬는데 서너대의 전세버스에 나누어 타고온 경북대학교 학생들이 푸르게 푸르게 내린다. 하얀 이 드러내며 함박웃음 가득 안고... 꼭같이 맞춰입은 하얀 티에 "민족 경북"이라는 글씨 아래 "가자 5. 18로!"라는 붓글씨가 힘차다. 우리 민족이 그래도 희망이 있음은 이런 젊음들이 곳곳에 있기 때문이리라. 고맙고 고맙고 또 고맙다. 지위의 고하 빈부의 높낮이를 가리지않고 만인을 감싸안는 그 품이 넉넉한 지리산.
한참을 흘러가니 물 마른 '국가하천 섬진강'이 눈 앞에 달려든다. 두꺼비들이 소리 질러 왜구를 물리쳤다는 호국전설이 스려있는 아련한 향수에 잠기는 섬진강이 강 건너면 사돈이고 이웃인 호남과 영남을 어떻게 갈라놓았을까 의문의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느릿느릿 섬진강이 이웃을 섬기며 살던 민초들의 따싸한 마음을 가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금도 화개장터에 가면 유효하다. 다만 알량한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한 소수의 무리가 고려 훈요십조 이래로 넉넉하고 아름다운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며칠 전 타개한 박경리의 '토지'가 서희의 강단진 모습 더불어 서늘한 웃음 더얹어 펼쳐진다. 우리의 민족들이 그렇게 그렇게 살아왔음을 새기며 섬진강을 넘는다. 영남을 건너 호남이다. 양반 상놈의 굴레를 뛰어넘어 기어이 사랑을 이룬 절개 춘향의 얼이 서린 남원을 지나 고추장 매운 맛이 쭉쭉 뻗은 대나무 더불어 풍기는 순창을 지나 애향의 도시에서 민주화의 성지로 각인된 빛고을로 들어서니 어머니의 품같은 무등산이 우리를 반긴다. 잘 오셨노라며 그 덕스러운 모습으로 두 팔을 한껏 벌리며 감싸안는다.

빛고을 시내를 벗어나 달리는 차창으로 펼쳐지는 논밭의 선홍색 흙빛이 서럽다.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싯귀처럼 핏빛으로 물들어 붉게 더 붉게 빛나는 황토빛 색깔. 그 민중의 신음이 스며든 황토빛 흙길을 따라 찾아간 쓰러져 가는 양철지붕의 집이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의 대변인이었던 윤상원의 생가란다. 한참을 들어다 보고 있는데 윤상원의 노모가 나오신다. 부모는 죽어 산천에 묻고 자식은 죽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떠오르며 눈 앞에 서 계시는 어머님이 내 어머님인 양 인사를 드렸다. 그 아린 가슴을 누구가 위로를 할 수 있을까. 같이 간 일행의 여인들이 눈물을 훔친다. 잠시 후 유시민 장관이 와서 함께 광주회원의 설명을 들으며 생가를 둘러본다. 생전에 사용하던 일기장이 펼쳐져 있고 영혼 결혼식을 한 박기순의 사진 더불어 잘 오셨노라며 우리를 반긴다. 한 동안 못에 박힌 듯 그대로 서서 유품들을 물끄럼이 바라본다. 머리가 텅 빈 채 아무 생각없이... 어머님이 수박을 썰어 나오셨다. 감사히 들고 떠나려는데 어머님의 애잔한 모습이 자꾸 눈에 밟힌다. 흐드러지게 지천으로 피어난 찔레꽃이 더욱 우리를 서럽게 서럽게 울린다.
5. 18 묘지를 가는 길. 양 옆으론 핏빛 선연한 만장들이 흐느끼며 너울대고 차를 세우니 아가들의 고사리 손으로 매단 리본들이 예쁜 순수를 새겨 한들거린다. 그 곳에서도 오롯한 희망을 보았다. 유인태, 박상천, 김근태, 정세균이 인사를 하며 내 앞을 지난다. 기분이 참 묘하다. 경내를 서성거리는데 내일 기념식을 위한 청와대 경호팀의 행동이 사납게 느껴진다. 꿈틀거리는 반골의 기질을 억지로 누르며 먼 하늘만 쳐다 보았다. 한참을 기다리며 둘러보는데 다른 곳에 들릴 일이 있어 늦어진 유시민 장관이 도착했다. 그 어떤 교만한 자가 쳐다봐도 기가 눌릴 눈 앞에 펼쳐지는 웅혼한 탑을 보며 서울, 부천, 대전, 경주, 대구, 광주에서 모여든 유시민을 사랑하는 사람들 60여명의 공식행사가 행사요원의 안내에 따라 펼쳐졌다. 헌화를 하고 분향을 하고 묵념을 드리고...
경내를 둘러본다. 전국에서 모여든 대학생들이 무덤 여기 저기에 흩어져 노래를 부르며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숙이며 선배들의 설명을 적으며... 고맙고 또 고맙다. 이들이 장성한 나라는 좀 더 나아질 것이란 믿음을 안으며 마주 쳐다보며 환하게 웃는다. 둘러보는 무덤에도 찾는 이들이 차이가 있나보다. 유명인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무덤. 씁쓸하다. 다른 사람들이 그냥 스쳐지나치는 무덤에 올올이 박힌 비석의 뒷면을 살폈다. 나는 이런 꿈으로 이 세상을 살다가 지금 이 곳에 묻혀있노라. 어떤 시편에도 비교할 수 없는 잔잔한 감동이 스미어 미친다. 그 시절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보안법 위반이었던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로 속울음을 삭이다 한이 되었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오버랩된다. 처연한 심정으로 광주 동지의 설명을 들으며 잊혀지던 그 날 광주를 되떠올리며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는다.
차는 묘소를 떠나 아늑하고 한적한 풀밭이 펼쳐진 근처 공원에 다다랐다. 너무 아름다워 행여 더럽혀질까 봐 어디 용변 볼 곳이 없어 쩔쩔 맸다는 정비석의 '금강산 기행문'을 떠올리며 화장실을 찾았다. 그런 곳이 다만 금강산 뿐이랴! 우리나라 강산치고 어디 아름답고 정겹지 않는 곳이 있으랴. 광주광장의 정성스런 준비로 정겹게 차려진 점심 겸한 저녁을 허기가 지는 오후 5시에 드는데 꿀맛이 이런 것이구나 느끼며 숟가락이 바쁘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풀밭에서 먹는 음식. 전국에서 오시는 회원들을 생각하며 대접을 한다고 갓잡아 온 홍어맛을 보셨는지. 1시간여 대화모임을 가진다.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인 곳이구나 느끼며 너무 빨리 흐르는 애꿎은 시계만 곁눈질 할 뿐이다.
유시민 장관의 말이 이어진다. 올 2학기부터 대학 강단에 서기로 되어 있다. 자료수집은 진작에 마치고 국회의원한다고 묵혀 책으로 묶지못한 헌법에 관한 책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우리나라 헌법이 참 좋은 것인데 너무 어렵게 적어놓아 '온건한 진보의 눈으로 보는 헌법 풀이'를 펴 보려고 한다. 서울 근처에 집필실을 마련하고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연구를 계속 하려고 한다. 지금 노무현, 유시민이 왜 말이 없느냐. 국민들이 너무 잘 하심으로 서둘러 나설 필요가 없다. 괜히 나서서 잘 가는 말에 째찍을 휘두르는 우를 범할 필요가 없다. 국민들이 이제는 많이 똑똑해져 어리석은 정치인들이 설레발을 칠 시대가 아니다. 역사는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김영삼 정부가 군사정부로 부터 3당 합당으로 쟁취한 1/3민주정부라면, 김대중 정부는 자민련과 합당하며 만든 2/3민주정부이고, 노무현 정부가 온전한 3/3민주정부인데 이번 선거로 역사의 시계를 되돌려 거꾸로 퇴행하는 이명박 정부가 탄생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반드시 순리로 흐르는 게 진리이기에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대구가 변하면 대한민국의 정치가 변하는 것은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이다. 따라서 몇 년이 걸릴지라도 대구에서 승부를 보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겠는가.
일정이 빼곡해서 버스의 숨이 가빠지기 시작한다. 이름도 고즈녁한 사직공원 오르막에 차를 세웠다. 드디어 충장로를 지나 금남로를 바라며 분수광장으로 걸음이 빨라지고 마음도 조급해진다. 촛불이 타오른다. 함성이 메아리 친다. 북소리가 가슴을 때린다. 징소리가 여운처럼 귓가에 앉는다. 아! 광주에 내가 왔구나. 핏빛 오월에 동참하는구나. 일행을 떠나 금남로를 따라 걸었다. '미친 소 너나 먹어' '2mb 너나 먹어' 온갖 단체와 유치원 애기까지 나와서 손을 흔들고 촛불을 켠다. 농악소리가 흥겹게 들리는 곳으로 바쁘게 걸었다. 고개를 들이밀며 바라보는데 예쁜 초등 여학생이 손을 끈다. 같이 더불어 풍물이 맞춰 얼쑤 춤을 추자며... 이렇게 한 마음이 되는구나. 이렇게 어우러지는구나. 다시 분수광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만인 발언대에 너도 나도 스스럼없이 올라선다. 미친 소에 관한 목소리가 높다. 이명박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현 정부가 위태 위태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늦은 9시. 까만 하늘에 수 놓듯 점점이 박힌 별들을 뒤로 하며 빛고을을 떠난다. 칠흑 밤하늘을 배경 삼아 스치우는 산천이 수묵화처럼 애잔하게 다가섰다 멀어졌다 한다. 골골마다 반짝이는 불빛 아래 알콩달콩 모여 아옹다옹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들이 언제까지나 내내 행복하시길 빌어본다. 가슴 아파 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힘있는 자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았음 좋겠다. 움켜쥐는 마음보다 남에게 펴는 손들이 많았음 좋겠다. 그런 세상을 앞당기는데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는 예쁜 마음이면 좋겠다. 빛고을로 올 때 쉬었던 지리산 휴게소에 다시 차를 세웠다. 휴게소 앞에 날카롭게 세운 조형물이 넉넉한 지리산과 대비되어 흉물스럽다. 피묻은 총칼 냄새를 풍기는 반자연적인 철골 구조물을 세운 마음들이 밉다.
처음 만난 얼굴들이라 닉네임과 사람의 얼굴이 매치가 되지않는다. 옥에 티라면 이런 모임에는 작은 이름표라도 달아 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래도 애써 얼굴을 떠올려본다. 참 좋은 사람들의 모임. 뜻 깊은 여행. 달구벌에 도착하여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들을 바라보며 평안들 하시라 기원한다. 집에 도착하여 샤워를 끝내니 5.18의 시작인 0시를 지나 2시가 가까와지고 있었다. 2008년 5월 17일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