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탄핵반대 촛불시위 '국민 사회자' 최광기 다시 거리에 서다

↑ 소외된 사람들의 울분을 자신의 목소리로 대신해 한을 풀어주는 국민사회자 최광기씨는 마이크를 든 21세기의 ‘무당’이다. 12일 밤, 그는 빗속에서도 촛불을 든 이들과 함께 했다. |김정근 기자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열린 지난주, '국민 사회자' '거리의 사회자' 최광기씨(40)는 시민단체 인사들과 미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있었다. 현지에서 이유 없이 몸이 아팠다. 3주 동안 내내 건강했는데 갑자기 입술이 부르트고 어지럽고 자꾸 집에 돌아가고 싶어졌다. 함께 간 사람들이 인터넷을 보고 "지금 서울에서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고 나라가 뒤숭숭하다"고 전해줘서야 왜 자신이 아픈지 알았다. 그리고 이끌리듯 인터넷 동영상을 통해 촛불집회 모습을 지켜보았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철회 촛불집회에서 30만 관중을 휘어잡아 '국민 사회자'로 불린 최씨. 그는 15년 이상을 거리에서 사람들과 호흡해서인지 이제 신기(神氣)처럼 그들의 마음이 전해진다고 했다. 11일 밤 귀국해 여독이 풀리지 않은 최씨를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는 청계천에서 만났다. 비로소 그곳에서, 그는 활기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난 2일 이후에 곳곳에서 촛불집회가 열립니다. 촛불집회하면 떠오르는 게 최광기씨인데 사회를 봐달라는 요청을 받았나요.
"제가 4월18일부터 미국에 머물러서 직접 연락을 받지 못했어요. 또 노트북을 가져가지 않아 메일 확인도 못해봤죠. 11일 밤에 도착했는데 집회 사회만 아니라 몇 군데서 요청이 왔더군요. 아직 정신이 없어 정확한 스케줄을 잡지 못했습니다."
-대중심리를 가장 잘 파악하는 사람 중의 하나인데 왜 여중생과 주부들까지 나서서 촛불시위를 한다고 생각합니까.
"지도자와 국민들 사이에 제일 중요한 게 '소통'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소통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잘되지 않았고, 이명박 정부는 아예 국민들과 소통할 의사가 전혀 없는 것 같아요. 가진 자의 눈으로, 힘의 논리로 보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거나 들리지 않나봅니다. 쇠고기 수입을 하더라도 그 전에 안전성을 확보하고, 국민적 여론이 성숙되었을 때 했다면 왜 반대하겠어요. 그런데 무조건 밀어붙이기만 하니까 국민들이 과연 누구를 위한 대통령이고 어느 나라 정부인가 화가 나고 답답해서 거리로 나온거죠. 세대간 소통, 이념간 소통, 남녀간 소통이 제일 중요한데 정부에서 '좌파가 선동했다'고 이념의 장난질을 치고, '먹거리에 관련된거라 민감한 아줌마들이 나섰다'라고 하는데 남자들은 쇠고기 안 먹나요?"
-4년 전 탄핵 철회 촛불시위와 지금 촛불집회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시민들이 촛불을 드는 이유는 또 뭘까요.
"4년 전 광화문에 모였던 이들은 꼭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거나 탄핵을 반대하는 이들만 모인 건 아니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게 목숨인데 자신들이 청춘기인 1970, 80년대에 목숨을 바쳐 지키려했던 민주주의 수호가 다시 어그러지는 것에 대해 분노한 이들이 모였죠. 그들은 일상에 쫓겨 하루하루 살아가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뭘 지키고 살아야 하는지도 생각해볼 여유가 없다가 촛불 하나 켜들고 자신의 잃어버린 자아와 꿈, 그리고 희망을 발견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하더군요. 그 집회만이 아니라 과거 우리나라 광장의 경험이 절반의 실패이거나 미완으로 끝났는데 자신이 직접 광장에 나와 과거 속에서 미래의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을 갖고 다른 이들과도 연대감을 느끼는 체험을 한거죠. 요즘의 촛불집회는 민주주의 수호란 이념이 아니라 우리 개인의 생명, 생활의 절박함을 주장하는 겁니다. 이 정부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이들이 과격한 시위가 아니라 자유롭고 평화로운 촛불문화로 국민권리를 주장하는 겁니다."
-15년 동안 1000회가 넘는 집회의 사회를 봤지만 노 대통령 탄핵 철회 집회의 열정적 사회로 '국민 사회자'란 칭호를 얻었는데 그후에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촛불집회가 끝나고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우선 몸이 완전히 망가졌어요. 20만~30만명의 관중들에게 제가 가진 기운을 다 쏟아부어주고 그들의 울분과 고통을 모두 흡수하다보니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더군요. 한의사가 진맥을 한 후에 '가죽에 있는 기운까지 다 태워버렸다'고 하더군요. 8개월 동안 한약을 먹고 겨우 몸을 추슬렀습니다. 하지만 더욱 괴로웠던 것은 사람들의 비아냥이었어요. 노 대통령이 복귀한 후 마치 제가 자리를 탐내거나 정치적 야심 있는 사람처럼 '일등공신인데 아직도 청와대에 안 들어갔어?'라고 묻고 그후엔 '(탄핵될 때 보냈어야 하는데) 당신 때문에 나라가 이 꼴이 됐다'고 비난하는 분들도 많았고…."
-결혼식 때 노 대통령이 주례를 섰고, 책에서도 가장 말을 잘하는 사람으로 노 대통령을 꼽았는데 요즘도 친하게 지냅니까.
"아뇨. 그분이 인권변호사일 때 각종 시위 현장에서 자주 만났습니다. 그리고 노 대통령이 여기저기 선거에서 다 떨어졌을 시절에 주례를 부탁드렸습니다. 그런데 제 남편이 지금은 뒤늦게 졸업했지만 당시엔 대학 중퇴한 상태여서 그건 말하지 말라고 부탁드렸는데도 '대학도 못나온 변변치 못한 남자와 사람들 많은 데서도 큰 목소리를 내는 뻔뻔한 여자가 만났다. 과연 잘 살지 모르겠다'고 특유의 화법으로 주례사를 남기셔서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분의 연설은 반전의 묘미가 강점인데 그때는 반전도 안했어요.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대중들과 잘 소통이 되지 않은 것은 사회에 대한 열등감과 분노가 너무 커서인 것 같아요."
-수더분한 외모에 큰소리 한번 내보지 않은 모범생 타입인데 어떻게 그렇게 '광기'에 가득찬 사회를 보게 되었는지요.
"어렸을 때부터 꿈이 사회자였어요. 반장도 하고 모범생이긴 했지만 학교 행사에서 사회를 잘 봤죠. 대학도 사회학과를 갔고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도 광기라 광적인 사회를 보는 게 팔자란 생각을 해요(웃음). 대학 선배가 '나 일하는 곳에 놀러오면 밥사줄게'란 말에 밥먹으러 갔다가 동덕여대 3학년 때부터 10년간 '상계 어머니학교'(빈민여성공부방)에서 어머니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스물여섯살 때 어머니학교 처녀 교장이라고 경향신문에 소개되기도 했어요. 93년 도시빈민문화제의 사회를 본 게 데뷔 무대입니다. 95년 11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창립 전야제 때 사회를 봤는데
연세대 노천 극장에 노동자 4만∼5만명이 가득찬 대규모 인파 속에서 7∼8시간 동안 밤새 혼자 사회를 봤더니 그야말로 다들 뒤집어지고 졸지에 떴죠. 그 행사를 계기로 전국을 돌면서 노동계 행사 사회를 보게 됐고 인권·통일·여성 등 각종 행사로 범위를 넓히게 됐습니다."
-수십만명의 사람들을 휘어잡는 비결이 뭔가요.
"제가 목소리가 크고 과격해보이지만 사실 생각도 매우 유연하고 놀기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선동을 하거나 구호를 외친다고 사람들이 집중하고 호응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무엇보다 모인 분들의 입장이 되고 그들의 마음이 되려고 노력해요. 왜 이 사람들이 이 자리에 나왔을까를 생각하고, 또 지금 상태가 어떤가를 파악하죠. 사회를 보는 이들이야 자기 흥에 도취되어 소리 지르고 흥분하면 그만이지만, 맨바닥에 앉아 서너시간씩 버티는 이들은 얼마나 지겨울까, 춥진 않을까 잘 헤아리지 않거든요. 그래서 좀 추울 것 같으면 자리에서 일어나 춤추자고 하고, 함께 박수치거나 노래를 부르자고 하면 금방 따라하죠. 15년을 그들과 교감했더니 이젠 정말 '그분이 오신 듯' 감정이입이 된답니다. 시민운동을 비롯, 집회를 하는 분들이 이념도 중요하지만 더욱 대중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 자리에 모인 분들께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주려고 강요해선 안됩니다. 또 꼭 이념이 같은 분들, 자신을 이해하는 이들만 모인 게 아닌데 한번에 많은 걸 이루려고 욕심을 내니까 참석한 이들이 회의를 느끼게 되죠. 2004년 촛불집회도 그랬죠. 그 자리에 나온 이유를 스스로 깨닫고 즐겨야 하는데 구호와 선동으로 강요하니까 '내가 왜 여기 왔지?'라고 회의를 느껴 자꾸 분열하고 동력이 떨어지는 겁니다."
-선동은 안한다지만 사회를 보며 '개새끼' 등등 욕도 하더군요. 특히 "국민을 졸로 아는 것들, 너희는 좆도 아니야! 진짜 아니야…!"라고 외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평소에도 욕을 잘합니까.
"누가 저보고 '욕설이 아름다운 여자'라고 하더군요. 제가 뭐든 엄청나게 잘 참아요. 제가 녹내장으로 한쪽 눈은 거의 실명 상태라 3급장애인이고 사회를 보면서 목소리를 높이다보니 성대결절이라 목도 아프고, 여기저기 성한 게 없는데 그게 다 혼자 끙끙 앓고 참기만 했기 때문이래요. 또 빈민여성이나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다보면 '진짜 개새끼'들을 너무 많이 만났어요. 매일 술마시고 바람 피우면서도 아내를 초죽음 상태로 때린 폭력 남편, 노동자들 임금 착취하는 악질 고용주 등등을 보면서 속으로만 욕을 중얼중얼거리면서 한번 겉으로 내뱉어 보는 게 소원이었거든요. 사회를 보면서 슬쩍 욕을 해봤는데 너무 호응이 좋더군요. 대중들의 속에 가득찬 분노를 제가 대신 욕해주니 속이 시원하다면서요. 그게 이젠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사회만 아니라 이젠 강의도 하고 방송진행도 하는데 말 잘하는 비결이 있나요?
"제가 '밥이 되는 말 희망이 되는 말'이란 책에도 썼지만 말을 하거나 사회를 볼 때 가장 중요한 건 상대방과 호흡을 같이 하는 겁니다. 그들의 삶을 함께 느끼고 그들의 말을 배우는 자세로 임해야 소통이 되거든요. 제가 말을 잘한다면 그건 모두 상계동 빈민촌어머니학교 시절의 경험 덕분이에요. 그분들께 글을 가르치고, 자신의 속내를 글로 써보라고 하면서 대화를 했는데 그분들로부터 그토록 쉽고 진솔한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어요. 미사여구로 포장되거나 괜히 어려운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솔직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법을 아줌마들과 대화하며 배웠습니다. 그래야 감동을 줄 수 있죠. 세치 혀에서 나오는 삼촌설의 감동이 사회를 바꾸는 힘입니다. 그리고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들의 마음을 읽고 그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거죠."
-만삭일 때 구급차를 대기시켜놓은 채 사회를 보고, 무대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져도 끝까지 진행하는 열정은 어디서 나옵니까.
"제 별명이 덩치가 크다고 '허우대'예요. 하지만 그런 힘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옵니다. 수만명의 관중들이 저를 바라보고, 제 말 하나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는데 좀 아프다고 게으름 피울 수는 없죠. 그리고 성대결절로 절대 크게 소리 지르면 안되는데 무대에만 서면 저도 모르게 소리가 커지고 신명이 나고…. 아무래도 제 이름처럼 광기가 있나봐요."
-엄청난 행사의 사회를 봤습니다만 대부분 빈민층, 노동층의 행사여서 돈을 별로 못 벌었을 것 같아요. 인기 개그맨들은 대기업 행사에 가면 시간당 1000만원이 넘는 돈을 받기도 하는데 아직도 돈에 관심이 없습니까.
"첫 사회에서 사비례로 40만원을 받았는데 당시 제 월급이 20만원, 그것도 받았다 말았다 할 때라 너무 신나고 황송했어요. 그 돈으로 어머니학교 아줌마들과 회식을 했죠. 제가 소수자의 대변인으로 불리는데 많은 돈을 달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젠 두 아이를 키우는 생활인이니까 돈을 받을 만한 곳에선 제대로 받으려고 합니다."
-온몸이 성한 데가 없고, 다니시는 곳도 온통 억울하고 답답한 사람들이 모인 곳인데 항상 유머 감각이 넘치는 비결도 궁금합니다.
"한쪽 눈이 실명 상태인데 한쪽 눈으로만 봐도 제대로만 보면 되죠. 또 저는 항상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해요. 완벽한 행복은 없습니다. 비가 오면 비오는 대로 감사하고, 맑으면 맑은 대로 감사하는 것이 절망에서 헤어날 수 있는 비결입니다. 5년 전 남편이 부도를 맞아 빚더미에 앉았는데 명상으로 마음을 추스르려 해도 잘 안되더군요. 남이 변화를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변화를 일으키고 스스로에게 항상 긍정적인 세뇌를 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도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난 예쁘다'고 최면을 걸며 매일 방긋 웃기 시작했더니 다들 예뻐졌다며 성형수술했느냐는 의혹도 받아요. 제가 긍정적이어야 남들에게도 긍정적 에너지를 주고 제가 웃어야 남들도 웃죠."
-다시 촛불이 켜지기 시작하는데 거리로 나가서 마이크를 잡을 계획인가요.
"솔직히 거리가 두렵습니다. 함성과 열망이 컸지만 큰 변화를 일으키진 못했다는 자괴감도 있고요. 하지만 국민들의 마음이 함께 하는 곳에 서고 싶어요.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를 따질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생명과 우리들의 존엄을 한목소리로 낼 수 있는 곳에선 나서야겠지요. 그게 제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