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일기] 내가 서 있는 자리
국민 앞에 내가 서 있는 위치를 생각해봅니다.
적지 않은 분들은 나의 지난 5년을 당과 조직을 위한 헌신과 희생으로 보아주십니다. 개선문 앞의 영웅은 아니더라도 늘 동정과 위로의 대상이었습니다. 감사하고 분에 넘치는 일입니다.
국민의 눈높이로 보면 어떤 위치일까요.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 주관적인 인생과 사연을 다 지워버리고 국민의 눈높이로 볼 때 나는 누구인가를 늘 묻곤 했습니다.
지난 2005년 8월의 일입니다.
감옥에서 나온 지 반 년 여만에 사면복권에 관한 이야기들이 한참 신문 지면을 달구었습니다. 정대철, 이상수 의원 등 2002년 대선자금과 관련하여 형을 받은 이들에게 사면과 복권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당에서 말했습니다.
일부의 사람들은 대통령 사면권은 이리하나 저리하나 늘 공격당하고 비판받기 마련이니 여론에 신경 써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저를 응원해 주었습니다. 폭넓은 사면복권이 단행되어야 한다고 격려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절친한 친구 한 명이 우리 집으로 놀러 왔습니다.
"희정씨 이번에 사면 복권되나"
"글쎄… 형도 다 살았고 법이 정한 벌은 다 받았으니 사면이 아니라 복권이 남은 건데… 어찌 될지 나도 잘 모르겠어…."
"내 생각엔… 이번에 사면 복권되면 안 될 것 같아요. 과거의 대선자금과 비교해 볼 때 알고 보면 억울한 일이겠지만 국민들은 그런 것 생각 안 할 것 같아요…."
"....(허걱)"
위로와 격려를 기대했던 제게 그 친구의 솔직한 답변은 표현은 못 했지만 충격이었습니다.
그 밤을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다음 날 당에 편지를 띄웠습니다. 저처럼 측근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당의 사면·복권 청원자 명단에서 빠지겠다고….
예! 제가 늘 착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서 있는 곳은 자랑스러운 개선문 앞이 아니라 형무소 정문 앞이라는 사실을요….
다시 2008년 저는 조심스럽게 새로운 출발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그 출발이 부딪히고 있는 현실은 냉정합니다. 엊그제 박재승 위원장 및 공심위원들은 나에게 공천 신청자의 자격도 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현실을 어찌할 것인가.
어떻게든 뚫고 넘어가야 할 산일 뿐인가.
정치는 지지자, 내 지역의 유권자들에게 심판받는 일입니다. 정치는 주권자들의 투표라는 행위를 통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현실의 모순된 상황들을 깔끔하게 정리해 버립니다. 그런 점에서 뚫고 넘어가 보자는 내 마음속의 흐름도 있습니다.
그래서 밤새 고민하고 또 고민했었습니다. 우리 지지자들에게 물어볼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문일 뿐입니다. "그만둬!"라고 말하기보다는 위로하고 격려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부모님께 "나 이뻐요"라고 묻는 것과 같은 우문일뿐입니다.
하지만, 지지자들만으로 정치가 완성되고 정치인이 성장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치면 2004년 가스통을 둘러멘 지지자들에 둘러싸여서 기사회생한 어느 정치인을 우리는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개인의 생존에 성공했을 뿐이었습니다.
남의 집 일이든 내 집 일이든 동네 사람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상식선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탈락을 포함한 전과자 일괄배제 선언을 놓고 많은 이들이 박수를 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이들의 박수 소리 속에서 같이 기뻐하지 못하고 가슴 졸이며 벙어리 냉가슴 앓는 지지자들이 있습니다. 이 모순된 상황을 저는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민심 앞에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예를 올리려 합니다.
과정과 절차를 지키는 민주주의자의 원칙으로 볼 때에도 당연한 처신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떠나서 불법정치자금에 연루되었던 제가 국민 앞에 보여드려야 저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백 마디 반성의 말보다 국민이 동의하고 있는 공심위의 그 결정을 존중하고 수용하는 실천이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재심을 청구하며 다시 한 번 재론해 주시길 요청했습니다만….
제가 서 있는 위치….
개선문 광장이 아니라 형무소 정문 앞임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그 자리가 2004년 재판정에서 제가 말한 것처럼 역사 앞에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나름의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있습니다. 수천억씩 써서라도 무법천지, 사생결단의 투쟁을 해야 한다고 믿었던 우리의 권력투쟁 역사에 커다란 이정표를 찍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는 대중의 잘못된 믿음도 바로잡게 되었습니다. 승자이든 패자이든 원칙과 상식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린 영웅적 투쟁이었다고 저는 자부합니다.
그래서 저에 대한 지지가 단순한 동정심, 빚진 마음의 발로일 뿐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지지와 격려가 미래를 향해 더욱더 크게 발전하려면 큰 무당의 씻김굿과도 같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저는 판단했습니다.
내일 일에 대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도리와 상식이 제게 주는 원칙대로 행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길에 저를 던져야 하는 것이 제 의무이자 도리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다들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저 때문에 걱정하고 안타까워하시는 모든 분들께 죄송하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의신청 심사 결과를 지켜보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 안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