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란 본시 딱딱하지 않다. 진보는 본래 리버럴하게 말랑말랑한 것이다
한진보 한다는 것들조차 아직도 걸핏하면 리카르도 어쩌구 주워대며 앵무새처럼 맴맴거리는 것은, 이들의 머릿속이 18세기 박물관의 화석처럼 단단하게 굳어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을 ‘진보’ 라 칭하지 않는다. ‘퇴보’라고 정의 내린바 있다.
아프로만 일찌기 가라사대,
- 진보란 관성에 대한 극복이다 - 라고 하였다.
- ‘관성’- 이란 무엇인가? ‘제어기제’ 이다.
‘발진 과 정지’ 가 연속되는 동력에 대한 '콘트롤' 이다. 이것의 조절이 없으면 ‘진보’ 가 불가능하다.
‘동력’ 이라는 운동성 그 자체에 대한 발동의지가 없으면 무엇인가? ‘수구’ 이다.
‘동력’ 의지는 있으되 과거 지향으로 걸핏하면 “뒤로 돌아이~ 가! “ 이것들을 ‘퇴보’ 라고 한다.
유연함 = 관성의 극복 ,
이것과 방향성을 담보하지 않는 ‘변절 사꾸라’ 와는 엄연히 개념이 다르다 .
그러나, 이념의 식민지이자, 주변부 종속 문화에 길들인 역사와 전통을 조상의 빛난 얼로 떠받드는 반도엽전들의 진보연하는 ‘퇴보’ 들은 죽었다 깨나도 이것의 구분을 이해하지 않는다.
- 이해 못하는 게 아니라 기실 이해하기 싫은 것이다 -
왜냐구? 식민지에서는 주체적인 족보를 창시하다가는 자손대대로 울궈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민지인 것이다. 전형적인 식민지근성이다. 한진보한다는 것들조차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저들은 오늘도 리카르도 맴맴~ 을 주워 섬긴다. ‘진보’ 가 아니라 ‘퇴보’ 인 것이다.
- 진보란 관성에 대한 극복이다 -
발진과 정지에 작동하는 관성을 극복하는 ‘유연함’ 은, 그래서 결코 ‘진보’ 라는 개념의 본원적 가치인 ‘방향성’ 을 훼손하는 의미가 결코 아닌 것이다.
- 모로가도 아프로만 - 이것이 내 필명이다.
진보의 본원적 가치인 ‘방향성’ 을 담보하는 데 있어서 내 필명을 능가하는 그 어떤 이론과 석학을 나는 아직 본적이 없다.
그런데,
- 잡탕신당의 ‘방향성’ 은 어떠한가?.
= 김대중은 87년 양김시대의 ‘동서대립구도’ 라는 “10년전 뒤로 돌아이~ 가!” 만이 현실적인 응집력이라며 ‘퇴보’ 를 '후견인' 해 버렸다.
- 잡탕신당의 ‘관성’ 은 어떠했나?
= 박스떼기, 명의도용이 난무하는 데 그 어떤 룰의 콘트롤도 ‘작동제어’ 되지 못했다.
‘사꾸라’ 들이 나서서 진보의 본원적 가치인 ‘유연함’ 을 오히려 매도하는 ‘적반하장’ 의 현상이야 말로 주변부 종속 식민반도 엽전 ‘퇴보’ 들의 서글픈 코미디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