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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정동영의 반칙이 극에 달했을 때 이해찬 의원께 호소한 글을 약간 수정한 것입니다. 그때 이러한 원칙과 상식을 깨는 행동에 대해서 강력히 대처하면서 탈당해 줄 것을 호소했었습니다.
것은 이해찬 의원에겐 정치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수렁에 빠진 진보개혁세력의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는 값진 죽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필자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실 지금은 탈당하기엔 너무도 불리한 상태입니다. 정말 진보개혁세력이 고사당할 위기가 올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이라도 이렇게 결단해 준 이해찬 의원님의 용기에 환영과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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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퇴보를 막을 죽음이 필요하다.
왜 김구는 죽고 아브라함 링컨은 성공했는가? 노무현 대통령님이 정의가 죽지 않고 승리하는 역사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으며 자신은 그런 역사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그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대의와 대세이다. 대단히 통찰력 있는 말씀이며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죽고 싶어 죽었겠는가? 실패하고 싶어서 실패했겠는가? 그렇지 않다. 물론 시간을 지내고 나서 그들을 역사로 읽고 있는 입장에서는 분명 뭔가 제 3의 대안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시간 안에서 서 있는 상황은 좀 다를 수밖에 없다. 어느 순간 실패를 결단하고 죽음을 결단해야 할 때가 온 것이고, 그 때 그들은 자신을 던져 넣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죽었고 실패한 것이다.
물론 죽지 않고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를 만드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실패와 죽음 이외에는 원칙과 진실을 지킬 수 없을 때, 진리냐 목숨이냐를 선택해야 할 때 이들은 진리를 선택한 것이다.
역사 자신이 내일 일을 고민하고 해결한 ‘오늘’을 전달했어야 했는데(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다-성경), 이들이 다만 이 역사의 행보보다 더 빨리 달려왔고, 그래서 역사가 미쳐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수준까지 세상을 순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원칙, 진실, 진리 때문에 죽은 이들의 죽음은 의미가 없으며 가치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들은 자신의 죽음으로 역사의 나태함을 꾸중한 것이다. 역사의 꾸물거림에 크게 호통을 친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역사의 움직임 속에 계속 살아 있는 것이다.
역사를 꾸중하고 바로 세워서 걷게 하는 죽음을 죽어서 역사의 움직임 속에 지금까지 살아 있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죄와 사망을 향해 나가던 역사의 수레바퀴를 자신의 온 몸으로 막아서서 세우시고 자신의 죽음으로 호통을 쳐서 반대 방향으로 돌려 놓으셨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공의와 진리를 위한 수많은 죽음들이 역사의 진보를 이끌었고 오늘 역사는 여기까지 왔다. 민주화를 위한 고결한 죽음들이 대한민국의 역사를 호되게 꾸중하여서 꼼지락 거리던 역사가 열심히 뛰어서 선구자 노무현을 보호하고 대통령으로 세울 수 있는 수준까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순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아직 풍성히 공의로움을 누릴 수 있을 만큼의 역사적 진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함을 당하고 있다. 이제는 역사의 진보를 위하여 육체적 죽음을 통한 호통을 필요로 하지는 않으나, 여전히 꾸물거리는 역사를 꾸중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 역사를 진보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죽음이 여전히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정치적 죽음이다.
지금 우리는 역사의 퇴보를 목도하고 있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통해 제 궤도에 올랐던 역사의 진보가 여기서 멈춰 서서 이젠 다시 내리막을 굴러 내려가듯 가속도를 붙여서 뒤로 가려한다.
이처럼 갑작스런 멈춤과 퇴보의 위기가 도래하게 된 원인은 뼈아프게도 내부의 암 덩이가 권모술수와 배신과 불법을 통해서 온 몸에 퍼졌기 때문이다.
결국 민주개혁세력은 대선에서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한나라당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식과 원칙을 지키기보다는 정권을 한나라당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논리에 함몰된 것이다.
왜 빼앗겨서는 안되는가에 대해서 논의하지 않고 손학규 같은 한나라당 사람까지 끌어들였다. 결국 궁지에 몰려서 손대서는 안 될 지역주의에 기댐으로써 다음을 기약할 수 없을 만큼 망가져버렸다. 이제는 절망 밖에 남지 않았다.
민주개혁세력은 전멸할 수밖에 없는 시점까지 왔다. 손학규가 당대표가 된 당에서 민주개혁을 부르짖는 것 자체가 코미디다. 한나라당과 자유신당이 있는 상황에 또 다른 보수정당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손학규가 당대표인 민주신당까지 해서 세 당이 다 한나라당에 장악된 이 상황이 참담할 뿐이다.
이 역사의 퇴보를 막아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희생이 필요하다. 죽음이 필요하다. 정치적인 죽음이 필요하다. 누군가 정치적인 죽음을 통해서 희생하여서 역사를 꾸중해야 한다. 누가 이 죽음을 죽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