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두 분의 인생 스승이 있습니다.
두 분 다 내일모레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십니다.
원고 작업 때문에 거의 밖에 안 나가는 나의 일상이지만, 한 달에 서너 번 외출할 때는 항상 먼저 두 분께 전화드리고 막걸리 한잔으로 죄송함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새벽, 그 두 분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1. 國泰民安
먼저 이야기할 그 분을 여기서는 그냥 심 선생님이라고 하겠습니다.
심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86년 봄쯤이었습니다. 1979년에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가 囹圄의 생활을 하다가 그 해 봄 형집행정지로 나온 지 얼마 안 지나서였지요.
심 선생님이 갇히게 된 사유는... 이른바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줄여서 남민전)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시인 김남주, 문학평론가 임헌영, '파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등이 이 사건으로 구속되거나 도피하였지요. 물론 사형당한 사람도 있답니다. 이재문(고문 뒤 그 뒤탈로 옥중 사망), 신향식, 이해경 세 분이 사형당했지요.
그리고 내가 아는 심 선생님은 조직의 지도부에 있었으면서도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사형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1986년 봄에 만났을 때...요 심 선생님께서 참 막걸리를 좋아하시더군요. 나도 막걸리를 좋아하는지라, 자주 만나고 자주 말씀을 들었습니다. 심 선생님께서는 아직 복권이 안된 터라 그냥 백수로 지내실 때였고, 오후 어스름에 연락 없이 나타나셔서 술 한잔 하자고 하셨습니다. 나는 막걸리 한잔 대접하면서... 내 의식의 살을 찌웠습니다.
막걸리 나누면서 듣다 보니, 심 선생님께서는 아들 이름을 國泰民安 네 글자 중에서 두 자를 뽑아서 지으셨더군요. 아들 이름을 듣는 순간 '국태민안'에서 뽑았네요 하고 말씀드렸더니....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요즘 와서... 국태민안이라는 말을 너도나도 개도소도 다 써먹더군요. 하다못해 수첩공주의 사조직 이름도 국태민안포럼이랍니다.
심 선생님께서는 무릎을 칠 일이지만... 어쩌랴, 그렇다고 이제 와서 아들 이름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을! 그 아들은 벌써 딸 아들 하나씩 놓은 가장인 것을!
2. 時和年豊
두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내 인생 스승은 그냥 여기서 나 선생님이라고 하겠습니다.
나 선생님은 동아일보와 한국일보 문학평론으로 당선된 후 문단 평론과 저널리즘 평론으로 활동하다가 1980년도 이후 절필하고 있습니다. 왜 절필하고 있는지 잘 모르지만, 어렴풋이 그 내력 또는 마음을 이해는 할 만합니다.
원래 위르겐 하버마스를 전공하고, 그 제자인 조가x(조선일보 조 아무개 아니고, 실존철학을 주체철학으로 이론화시킨 그 사람... 그래서 남한 내에서는 함부로 이름을 거론 못하는 사람. 지금 뉴욕주립대 교수이네요)의 추천으로 서독 하버마스 연구실로 가기로 했다가 여러 사정으로 포기한 사람이 나 선생입니다. 그리고 철학을 버리고 문학평론으로 돌아섰습니다.
나 선생님을 만난 것은 1985년입니다. 그리고 나 선생님을 만난 이후 나는 문학을 버렸습니다. 당시 우리 현실에 문학이란 너무나도 무딘 칼이라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칼, 더 예리한 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문학 대신 사회과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성과도 없었고... 저쪽 진영(동구권)의 허무한 무너짐만 보았습니다.
그렇게 십여년 또 지냈습니다.
(1987년에... 나 선생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짱돌 던졌습니다. 요즘도 이 나 선샏님 그 이야기를 추억 삼아 하십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나 선생님께서 저더러 문학 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쓴 글이
<사무치면 꽃이 핀다-소설 노무현>
입니다.
그런데... 나 선생님은 딸 하나 두고 있는데요
그 딸은 세브란스 연구실에 근무하고 있고요
그 딸 이름이... 時和年豊 가운데 두 자를 따서 지었답니다.
새해, 맹박이랑 근혜랑 저 좋은 말들...
국태민안, 시화연풍
다 써먹고 있는데요...
내일 아침에 두 분 스승들께 전화라도 드릴 생각입니다.
아마 두 분 모두 속이 쓰릴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