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캠프의 ARS 경선
노항래 (이해찬 선대본 정책홍보팀장, 전 유시민선대본 정책팀장)
대통합민주신당의 국민경선이 어름 1/3 정도의 일정을 마친 지금, 곳곳에서 심각한 파열음을 내고 있다. 이해찬, 손학규 선거대책본부는 합동으로 경선일정의 전면 중단과 ‘현재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정동영 후보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불법행위, 동원경선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동영 후보측은 거듭 ‘동원경선을 우리만 했냐’며, 경쟁 캠프를 상대로 ‘차라리 자신의 능력부족을 돌아보라’고 일갈한다. 오십보백보라는 얘기다.
복기. 원칙의 부재가 빚은 참상
8월 5일 출범한 대통합민주신당이 열린우리당을 흡수합당한 것이 8월 21일. 이 날부터 현재의 국민경선이 사실상 출발했다. 경선 후보자 등록이 있었고, 8월 25일부터 선거인단 모집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0여 일 만에 1차 컷오프 선거가 있었다.
숨가쁜 나날이었다. 8월 18일 출마를 선언한 유시민 선대본의 경험을 통해 살피면, 8월말 당시 각 선거캠프는 한 명이라도 더 자신을 지지할 의사가 있는 선거인단 모집에 온 역량을 집중했다.
여기서 대리접수, 박스떼기가 이루어졌다.
정동영 캠프의 주장처럼 모든 캠프가 대리접수를 했다. 그러나 실적 차이는 엄청났다. 정동영 캠프가 등록 선거인단 모집 성적에서 단연 앞섰다.
가장 큰 차이는 본인의 의사를 확인하는지 여부였다. 유시민 선대본은 시민광장 등 자발적인 유시민 후보 지지자들을 상대로 선거인단 모집을 독려했고, 갬프 자원봉사자나 자발적 지지자들에게 100명을 기본으로 하는 지지자 모집을 통해 ‘유시민 지지 및 선거인단 참여 의사가 있는’ 유권자의 인적사항을 모아, 캠프에서 등록절차를 대리 할 수 있도록 했다(물론 본인 직접 등록 권유를 우선했다). 처음에 다른 캠프에 뒤지지 말자며 원대한 목표를 설정하기도 했지만, 시간은 짧았고, 지지자 모집은 인적자원의 현실을 넘어설 수 없었다.
당시 유시민 선대본은 과거 개혁국민정당의 구 당원 명부를 선거인단 모집에 활용하기 위해 자원봉사자들의 선거인단 참여 독려 전화독촉 작업을 진행하다가 당사자들로부터 개혁당 당원명부 소지의 타당성을 둘러싼 항의와 논란을 빚기도 했다. ‘선거인단 참여독촉 ⇨ 본인수락 여부 확인 ⇨ 대리신청’ 등의 절차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때 정동영 캠프의 동원전략이 다각도로 확인되었다. 특정 모임의 회원명부, 과거 열린우리당 당원기록부, 각 의원실에서 갖고 있는 후원자 등의 인적사항, 그리고 전북지역에서 생활체육협의회 회원 명부 등을 무더기로 선거인단에 집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선거인단 허위등재 역시 이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시 타 캠프는 그런 대규모 무작위 선거인단 등록의 영향력을 너무 작게 보았다. 다른 캠프는 판단하기를 ‘본인의 지지 의사를 확인하지 않은 채 접수된 명단은 정동영 후보의 지지표로 연결되지 않을 것이다’, ‘경선과정에서 정책의 우위, 이명박 후보에 대한 본선경쟁력 등을 입증하면 상대 캠프가 등록한 선거인단도 우리 표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여전히 ‘비밀선거인데 선거의 최소 원칙, 투표행위의 자발성을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처음부터 당은 국민경선의 기본취지인 ‘자발적 참여 원칙’을 경선룰에 명확히 했어야 했고, 이런 제도적 보완이 있었다면 현재의 파열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년여 동안 지속된 한나라당 그리고 이명박 후보에 대한 50% 지지율에 가위눌린 당은 ‘더 많은 참여 = 300만 국민경선선거인단 모집’만을 꿈꾸었고, 한 명이라도 더 신청될 수 있도록 등록과정의 검증절차를 간소화했으며, 이것이 각 캠프가 나선 대규모 대리접수로, 그리고 본인의 의사와 무관한 박스떼기 접수로 이어졌다.
구태정치와 결합한 ARS 경선
9월초부터 9월말까지 각 지역별로 선거인단 접수가 마감되었다. 그리고 9월 중순부터 본격적인 지역별 국민경선이 진행되었다. 10월초 현재 모두 8개 지역의 경선이 마감되었고, 여기서 정동영 후보는 상당한 표 차이로 수위를 달리고 있다.
대통합민주신당에 대한 국민들의 회의적 시각과 경선과정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경선룰 논란 등으로 국민경선은 애초의 취지와 달리 국민들 대다수의 냉소속에, ‘그들만의 리그’로 치루어지고 있다. 투표율은 15-20%를 오르내릴 뿐이다.
낮은 투표율은 대규모 대리접수, 박스떼기 선거인단 등록이 빚은 것이지만, 역시 국민들의 냉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이런 낮은 투표율 때문에 캠프의 동원력은 선거결과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각 캠프는 자신이 등록했던 지지자층을 우선적으로 설득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투표장에 나설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진행중인 선거운동의 기본이다.
당연히 독려할 선거인단 숫자가 많은 쪽이 유리하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누구나 알고 있었고 예상했던 정황이고, 굳이 문제삼기 어려운 사안일지도 모른다.
정작 문제는 예상하지 못했던 엉뚱한 곳에 있었다. 기상천외한 동원전략이 결과를 갈랐다. 바로 ARS(자동응답전화시스템) 여론조사다. 모든 여론조사는 모집단 개인의 인적사항을 공개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응답하는 개인의 의사표현의 자유,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우려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동영 캠프는 자신이 등록한 수 십 만 명의 선거인단 대리접수자들에 대해 지지 후보를 묻고, 그 중에서 정동영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선거인단을 표적으로 차량지원, 버스동원 등을 통해 투표소로 날랐다. 9월 30일 새벽 부산지역에서 있은 선거운동원의 불법적인 차량지원 행위 결의모임과 같은 날 부산 금정구의 정동영 후보 지역책이 자신이 운영하는 학원에서 경찰에 적발당한 선거인단의 지지후보 의사표시 확인 명부와 동원지원계획서가 입증하는 것이다. 그간 진행된 8개지역 경선 ‘1등’ 역시 지역민심이거나 유권자의 표심과 달리 바로 이 표적 동원의 결과라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아니, 명백하다.
선거인단에 등록된 유권자들에게 걸려오는 괴여론조사들이 그 증거다. 지지후보를 묻고 이해찬, 손학규를 답하면 그냥 끊어지는 조사전화들이다. 수많은 경험담이 인터넷 각종 사이트에 기록되어 있다. 이런 행위야말로 여론조사의 생명인 사회적 신뢰에 먹칠을 가하는 반사회적 범죄행위다.
이렇듯 과거의 동원정치에 현대의 ARS프로그램을 결합시킨 ‘괴물 공룡’이 출현한 것이다.
유시민 선대본에서, 이해찬 선대본에서 이런 동원을 기획한 바 없고, 들어본 바 없다. 그러나 정동영 선대본은 치밀하게 준비하고, 착오없이 이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는 것이다.
당을 망치고, 평화개혁세력의 붕괴를 자초할 구태와 싸워야 할 때
정동영 후보측의 반칙은 명백하다. 드러난 사실관계만을 살펴도 ‘오십보 백보’가 아니라, ‘질의 차이, 근본의 차이’를 감출 수 없다.
본인의 의사를 묻지 않은 대리접수, 불법적인 ARS 조사, 그리고 표적동원선거야말로 오늘 정동영 후보가 얻고 있는 성적표의 토대다. 저들은 ‘범여권 후보 중 여론조사 1위’를 거론하기도 하나, 앞에서 거둔 성적이 뒤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밴드왜건 효과’와 국민적 냉소속에서 이루어지는 찻잔속의 흔들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보았자 10%를 오르내리는 성적이 아니던가.
‘불법이 1등을 보장하는 경선’으로, 낙선 후보의 승복, 당의 단합,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오를 유지한 연말 대선 출정’을 보장할 수 있나. 단언컨대 불가능하다.
대선패배는 불문가지이고, 대통합민주신당은 붕괴할 것이며, 이 당을 통해 평화, 민주, 개혁, 미래 세력의 단합을 꿈꾸었던 우리 모두의 구상 역시 좌초하고 말 것이다.
지금 정동영 후보 진영에 맞선 이해찬, 손학규 후보 진영의 문제제기는 대통합민주신당의 당면한 최대 해결과제다. 구태정치와 싸우지 않는다면, 우리의 환부를 도려낼 용단이 없다면 당의 붕괴를 피할 수 없다. 70년대 이후 도도히 이어온 평화개혁세력의 운명이, 대권욕에 눈이 먼 한 구태정치인의 범죄행위 때문에 백척간두에 선 것이다.
‘새로운 것이 낡은 것을, 정직이 거짓을, 빛이 어둠을 이긴다.’ 이명박 후보를 잠재적 경쟁자로 살피며 준비한 저 문구는 채 피어보지 못한 유시민 선대본의 캐치프레이즈 중 하나였다. 이 구호가 대통합민주신당의 오늘에 주어진 과제라고 생각한다. 당의 맹성, 전 당원의 비상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동영 후보는 사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