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하고 애 보는 “잘난” 남자
유시민 / 마인츠 쿠텐베르크 대학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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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둘 사이에 아이가 끼어들면서 그 좋았던 시절이 막을 내렸다. 우유 타 먹이고 한밤중에 기저귀 갈고 면기저귀 말리고 안아 재우고…. 이제까지도 잠버릇이 고약한 아내가 다시 공부를 하겠노라고 선언하고 나서 사태가 심각해졌다.
이제는 집안일, 특히 아이 보는 일을 두고 나와 아내 사이에는 때로는 은밀한, 더러는 버젓한 투쟁이 벌어지기에 이르렀다. |
요 사이는 가사 노동이라는 말을 많이들 쓰지만 편하게 그냥 집안일이라고 하자. 나는 남자치고는 그
런 집안일을 제법 하는 편이다. 그런데 청소나 빨래, 설거지 따위의 일은 필요하면 하지만 별 재미가 없다. 깔끔하게 치우고 나면 기분은 좋지만 기껏 해 보아야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데에 불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창조하는 점에서 가장 “노동다운” 집안일은 아무래도 아이를 돌보는 일인 듯하다. 정성들여 돌본 만큼 몸과 마음이 쑥쑥 자라나는 아이를 보노라면 때로는 짜증스럽기까지 한 “육아 노동”의 고달픔도 저만큼 달아나 버리고 그 자리에 보람과 기쁨이 그득히 고인다.
그런데 이제 겨우 세돌 반인 딸아이도 그 나름의 자존심과 고집이 있어 다루기가 여간 까다롭지가 않다. 아무리 손때 묻혀 키워 보아야 결국 제 잘난 대로 자라는 한 인격체인 마큼 보람은 있으나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요리는 즐거워
내키는 대로 주물럭거릴 수 있고 재미도 있는 집안일은 결국 요리이다. 무한정 다양한 야채와 생선과 고기가 다 저마다의 맛을 지니고 있지만,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여러 가지 다른 맛을 낼 수 있고, 손 가는 대로, 입맛 끄는 대로 이것저것 섞고 버무려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창조적이냐.
정부 기관에서 국민 총생산 통계에 잡아주지 않은들 무슨 상관이 되나. 새로운 맛을 창조하는 즐거움에다 온 식구가 -그래봐야 고작 세 식구지만- 둘러앉아 나누어 먹는 기쁨이 덤으로 따라오고, 게다가 손님이라도 오면 그 즐거움은 그만큼 더 커지지 않나?
이런 연고로 요 몇 년 사이에 다른 일은 몰라도 요리만큼은 확실한 내 몫이 되었다. 서울에서 살 때에는 어머니가 오셨다고 노량진 수산 시장에서 장을 한 아름 보아다 혼자 부엌에서 뚝딱거리고 있으면 오랜만에 만난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안방에서 오붓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이미 주방장으로 공인을 받은 터라 아내도 어머니도 그 때문에 미안해하거나 속 끓일 이유가 없다.
뒤늦게 다시 공부를 하느라 독일에 와서 산 지난 일년 남짓한 동안에 나는 돼지 다리 구이와 커피 가루로 맛을 낸 돼지불고기, 구절판과 쇠고기전골 같은 몇 가지 음식으로 이곳 마인쯔 대학의 여러 한국 유학생과 독일 친구들을 단골손님으로 확보하였다. 정말이지 발등에 불 떨어진 만큼 급한 일이 없을 바에야 요리는 즐겁다.
거창한 “혼인 공약”
“그렇지 않아도 가장의 권위가 흔들리는 이 시대에, 그래 제 스스로 그걸 걷어찰 것까진 뭐 있누” 하는 뜻있는 많은 남성들의 비아냥 섞인 충고를 못 들은 체하며 힘닿는 데까지 집안일을 나누어가지는 것은 결코 내가 무슨 멋있는 여성 해방론의 선봉자여서가 아니다. 밥 잘하고 청소 열심히 한다고 다 페미니스트일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집안일을 부지런히 하는 것은 그 무슨 “주의”를 신봉해서보다는.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남자로서 떳떳이” 살고 싶기 때문이고 스스로 한 약속을 어기기 싫어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음에 드는 여자와 혼인하고 싶어 안달이 난 남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나도 여러 가지 “혼인 공약”을 했다. 하기야 계약서로 만들어 서명하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 스스로 한 약속을 안 지키는 못난 남자가 되기는 싫으니까.
나와 아내는 둘 다 사회 활동을 계속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가사 노동에 관한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집안일은 가능한 대로 줄인다.” 이것이 “가사노동 최소화의 원칙”이다. “미리 비율을 정하지 말고 둘 가운데 시간이 많이 나는 쪽에서 더 한다.” 이것은 “합리적 배분의 원칙”이다. 가정생활보다는 사회 활동에서 더 큰 보람을 찾는 여자들이 다 그러하듯 아내도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 하는 식의 전통적 역할 분담을 거부한다. 그러니 이런 약속도 없이 혼인하자고 꼬드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기가 먼저 낳자고 했잖아”
팔십팔 년에 혼인하고 나서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의 두해 동안에는 만사가 순조로웠다. 가사 노동의 최소화, 이 얼마나 편리한 원칙이냐? 적당히 아침을 때우고 나가 점심은 일터에서 해결하고 바쁠 때면 저녁까지 먹고 들어왔다.
그때에 야당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하던 나는 광주 특위다, 예산-결산 위원회 일이다 하여 밝을 때에 들어오는 날이 드물었고 어떤 재야단체의 상근 직원으로 일한 아내는 아내대로 밤낮 분주했다. 주말이면 기껏 청소나 한번 하고 오랜만에 함께 있음을 구실삼아 동네 식당에 가서 “서민적인 의식”을 즐겼다. 이러니 쌀 한말로 석 달도 넘게 살았고 집안일이라 할 것이 없으니 서로 적게 하려고 다툴 일도 없었다. 말하자면 둘이 자취하듯이 산 것이다.
그런데 둘 사이에 아이가 끼어들면서 그 좋았던 시절이 막을 내렸다. 우유 타 먹이고 한밤중에 기저귀 갈고 면 기저귀 말리고 안아 재우고…. 이제까지도 잠버릇이 고약한 아이 때문에 늘 잠이 부족했던 아내가 다시 공부를 하겠노라고 선언하고 나서 사태가 심각해졌다.
칠십팔 년에 입학하였지만 도중에 두 번이나 학교에서 쫓겨나는 우여곡절 끝에 구십일 년에야 겨우 대학을 졸업한 나도 독일 통일이라는 대사건에 끌려 독일 유학을 결심했다. 그래서 이제는 집안일, 특히 아이 보는 일을 두고 나와 아내 사이에는 때로는 은밀한, 더러는 버젓한 투쟁이 벌어지기에 이르렀다.
“이제 교대 좀 하자고.”
“자기는 이번에 시험 없잖아? 나 다음 주에 시험 봐야 해.”
“시험만 공부야? 강의를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나도 다음 주 강의 참고 문헌 좀 읽고 가야 한다구.”
“방학만 시작하면 내가 시간 다 줄게. 난 방학 중엔 별일 없으니까.”
정말 수도 없이 되풀이한 입씨름이다. 거실 바닥에 가위질한 종이를 수북이 쌓아놓은 딸아이는 벌써 밤이 깊었건만 잘 생각을 않는다. 계속해서 아빠랑 놀게 되나, 아니면 엄마를 차지할 수 있을까 하고 가만히 분위기를 가늠해 보다가 그만 우리 부부가 가장 겁내는 한마디를 내뱉는다.
“놀아줘. 심심해.”
“아 좋았던 옛날이여, 무자식이 상팔자라더니 정말이네 그려! 사는 게 이게 뭐냐 고삼도 아닌데.” 자꾸 이런 쪽으로 생각이 가니까 불만이 쌓인다. “계산해 보자. 아무래도 내가 더 많은 시간을 집안일에 쓰는 것 아냐. 그래 맞아 적어도 한 시간은 더 한다. 하지만 시시콜콜 따지는 건 좀 치사하지 않을까?” 심사가 이렇게 돌아가니 다른 일을 트집 잡아 아내에게 신경질을 부린다. 하지만 아낸들 나와 다를 것이 있으랴.
“멘자의 소녀” 때문에
문제는 “가사 노동 최소화의 원칙”을 실현할 수 없는 오늘의 환경이다. 마인쯔 시의 주택난 때문에 이십 킬로 떨어진 시골 마을에 집을 얻었는데 여기에는 탁아소가 없다. 유치원은 세살이 되어야 보낼 수가 있다. 시내 탁아소에는 신청자가 밀려 자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합리적 분담의 원칙”에 따라 첫 학기에는 내가, 다음 학기에는 아내가 주로 공부를 했다.
온 가족이 하루 종일 여기 말로 “멘자”라고 하는 학생 식당의 카페테리아에 머물면서 교대로 강의를 들었다. 그 바람에 식당 직원들이 모두 알아보고 인사를 건넬 정도가 되었다. 우리는 아이의 별명을 “멘자의 소녀”라고 지었다.
방학에는 하루씩 나누어 도서관에 다녔다. 서울과 달리 그 편리한 동네 구멍가게가 없고 슈퍼마켓은 오후 여섯시에 어김없이 문을 닫으니 매주 한번 먹을 것과 마실 물 사는 것도 반나절 일거리로 떨어진다. 멘자의 점심 식사 말고는 외식을 생각할 수 없다. 돈도 돈이려니와 입에 맞는 음식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엌일이 한없이 늘어난다. 이처럼 집안일을 도저히 줄일 수 없는 상황에는 한 줄이라도 더 읽기 위한 신경전과 말다툼을 도저히 피할 수 없다.
이렇게 두 학기를 보내고 난 지난 해 여름 마침내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시월부터 자리를 줄 테니 아이를 대학구내 유치원에 맡기라는 통지서는 복음과도 같았다. 점심은 부모가 데리고 가서 먹이는 조건이었다. 우리는 희망에 들떠 시월을 기다렸다.
“두어 주일이면 적응을 할 테니까 시월 말에 학기가 시작되면 매주 스무 시간쯤 강의 듣고 함께 도서관에도 다니자. 수진이도 이젠 학생 식당 카페테리아에서 하루 종일 지내야 할 필요가 없어. 낮에 열심히 하고 밤에는 잘 놀아 주자. 공부도 좋지만 우리가 아이를 너무 짐스럽게 생각한 것 같지. 몇 달 지나면 우리보다 독일어를 더 잘하게 될 거야.”
“내일은 혹시”와 “오늘도 역시”
아, 그러나 모두가 헛된 꿈이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신 것이다. “싫어, 싫어, 유치원 안 갈래! 엄마랑 놀래. 아빠, 가지마!” 한달, 두 달이 지나도 아이는 완강히 거부했다. 독일어라고는 한 마디도 안했다. 우리가 일부러 집에서 독일어를 써 보았다. “독일말 하지 마!” 변한 것이라고는 학생 식당 대신에 유치원에 앉아 있으면서 맞교대로 수업하러 들어가게 된 것뿐이었다.
“안아 줘도 뿌리치고 자꾸 뛰어나가니 가능하다면 당분간 같이 있어 주세요” 하는 보모들의 권유에 따르니 다른 아이들이 팔자에 없는 보모 노릇을 강요한다. 보모 둘에 아이들 스물, 더 많은 사랑을 바라는 아이들은 내가 가만히 앉아 책을 읽게 버려두지 않는다. 쟈네트, 슈테피, 파스칼, 사무엘, 엘리사…. 세월은 빠르고 학문은 더딘데, 아이들은 아랑곳 않고 놀자고 졸라댄다.
“내일은 혹시”와 “오늘도 역시” 사이를 헤매다 보니 또 한 학기가 지났다.
돌아보면 악몽을 꾼 것만 같다. 여섯시에 시계가 아우성을 치면 겨우 일어나 세수하고 옷 갈아입고 빵 한쪽 먹고 자는 아이 옷 입혀 들쳐 업고, 그리고 찬바람 몰아치는 어두운 거리로 열 살 먹은 고물차 몰고 나서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여덟시부터 오후 네 시, 때로는 여섯시까지 교대로 유치원과 멘자에서 아이 지키면서 수업하러 들어가고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와 저녁 지어먹고 아이 씻기고 서로 눈치 보며 몇 줄 읽다 보면 하루가 끝났다.
“아, 좋았던 옛날이여. 무자식이 상팔자라더니 정말이네 그려! 사는 게 이게 뭐냐, 고삼도 아닌데.” 자꾸 이런 쪽으로 생각이 가니까 불만이 쌓인다. “계산해 보자. 아무래도 내가 더 많은 시간을 집안일에 쓰는 것 아냐. 그래 맞아, 적어도 한 시간은 더 한다. 하지만 시시콜콜 따지는 건 좀 치사하지 않을까?”
심사가 이렇게 돌아가니 다른 일을 트집 잡아 아내에게 신경질을 부린다. 하지만 아낸들 나와 다를 것이 있으랴. 나의 신경질은 금방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전에는 그런 줄 몰랐는데 자기는 참 신경질이 많아.”
“수진이 아빠는 밥 하잖아?”
얼마 전의 일이다. 세 들어 사는 집에 방이 하나 비었기에 우리보다 더한 시골에 사는 한국 유학생 가족에게 권했더니 이사를 왔다. 저녁 시간이나 휴일에는 그 집의 동갑내기 딸과 우리아이가 서로 오가며 잘 논다. 그런데 그 아이가 뜻밖에도 나에게 좋은 싸움 거리를 주었다. 우리 식구가 학교에 간 뒤로 그 아이는 몇 번이고 우리 집의 초인종을 눌러 동무를 찾곤 하는 모양이다. 보다 못한 그 아이의 어머니가 일러 주었다.
“수진이는 엄마 아빠하고 학교 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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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학기 시작할 때까지도 좋아지지 않으면 내가 그만두지 뭐.”
다시 어색한 침묵.
“그럼 뭐하고 살건데?”
“글쎄 천천히 생각해 봐야지. 할 일이야 없겠어?”
참으로 모진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혼자 돌아가겠노라고 협박해서 공부 그만두겠노라는 항복을 받았는데 어째 입맛이 참외 꼭지 씹는 느낌일까?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면 안 되는데. 잘못하면 “위기의 남과 여”가 될까 덜컥 겁이 났다. |
“아니다.”
“뭐가 아닌데?”
“수진이 아빠는 공부 안 한다. 수진이 엄마가 공부한다.”
“그럼 수진이 아빠는 뭐 하시는데?”
“수진이 아빠는 밥 하잖아?”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확신에 차서 아내를 다그쳤다.
“어떻게 생각해, 이 사태를 두고?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라고 하지 않아?”
“그래서?”
“이건 당신이 방과 후나 주말에 나보다 현저히 많은 시간을 공부한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 아니겠어? 아이들은 본 대로 이야기하니까. 아침에 수진이 유치원에도 내가 데려다 주고, 또 운전도 해야 하고 요새는 밥도 내가 전적으로 하고.”
“나는 설거지 안 해? 빨래도 내가 다하고, 그리고 수진이 잠들기 전에 한 두 시간은 꼭 엄마한테 치대지 않아? 자기는 그 시간 쓰잖아? 그 집 아이가 오는 시간에 내가 공부할 때가 많아서 그럴 거야.”
생각해 보니 그도 그럴듯한 논리라 싸움은 또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빈틈없는 논리로 나의 공세를 막아내는 아내가 결코 사랑스러워 보이지만은 않는다. 아하, 아내도 틈만 생기면 공세를 펴는 내가 야속할 테지. 이렇게 해서 우리도 사랑은 없고 생활만 있다는 중년 부부가 되어 가는가 보다.
아내 얼굴에 씌인 말
십 분부터 시작해서 이십분, 삼십분 늘여 나간 적응 훈련이 효과가 있었는지 석 달째부터는 아이가 두어 시간씩이나 혼자서도 잘 논다고 보모들이 귀띔해 주었다. 옳다구나하고 흥분해 오전, 오후 다섯 시간을 맡겨 두고 원래 계획한 강의를 다 들어갔더니 며칠 가지 않아 또 탈이 나고 말았다.
첫 시간 강의를 들어가려는데 막무가내로 옷자락을 잡고 울며 매달리는 것이다. 하도 심란해서 신발장에 쪽지 한 장 붙이고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점심시간에 아이를 데리러 간 아내가 놀라 전화를 걸었다. “몰라, 집에 와서 이야기해.”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며칠 동안 일이 그런 모양으로 돌아갔다. 고달픈 한 주일을 마치고 나니 스트레스 때문인지 소화도 안 되고 몸살 기운이 와르르 밀려왔다. 아이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내가 이러니 아인들 얼마나 괴로우랴. 공부가 좋다 한들 아이를 원수로 만들 수는 없는 일 아니냐? 한국사람 집에 맡겨두면 종일 잘 노는 아이가 저러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아니냐? 도대체 무슨 권리로 저 어린 것에게 그런 불안감과 외로움을 참으라고 요구할 수 있다는 말이냐?”
온 식구가 어두운 표정으로 마주앉았다. 나는 나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우울했다. 아이는 아이대로 저 한 짓이 마음에 걸리는지 슬슬 눈치를 살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아내였다.
“수진이 한국에 보낼까? 큰고모 댁이나 외할머니한테….”
“우리 새낀데 우리가 책임져야지 누구한테 떠넘기겠어? 그리고 보내놓고 눈에 밟혀서 공부가 될까?”
“하긴 그렇지. 다 잘 살려고 하는 짓인데 그렇게까지야….”
“나 수진이 데리고 한국에 돌아갈까? 당신 혼자 남아서 공부할래?”
침묵, 침묵 그리고 또 침묵. 아내가 아이를 안으며 한숨쉬듯 말한다.
“다음 학기 시작할 때까지도 좋아지지 않으면 내가 그만두지 뭐.”
다시 어색한 침묵.
“그럼 뭐하고 살건데?”
“글쎄, 천천히 생각해 봐야지. 할 일이야 없겠어?”
참으로 모진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혼자 돌아가겠노라고 협박해서 공부 그만두겠노라는 항복을 받았는데 어째 입맛이 참외꼭지 씹는 느낌일까?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면 안 되는데. 잘못하면 “위기의 남과 여”가 될까 덜컥 겁이 났다.
“이 사람이…. 이제까지 힘들게 공부한 게 얼만데, 당신 말마따나 가슴에 수없이 ‘참을 인 자 써가면서 살아야지. 수진이도 자꾸 크니까 틀림없이 좋아질 거야. 앞으로 살 날이 창창한데 공부해야지.”
“이 남자가 먼저 죽는 소리 한 게 누군데 대범한 척, 잘난 척을 혼자 다 하누?”
눈을 흘기는 아내의 얼굴에는 그렇게 씌여 있었다.
가사 노동은 “남자다움”의 기본?
사람이 적응하지 못하는 환경은 없는 모양이다. 이제 그런 생활도 이골이 났으니 오월이면 일년 넘게 기다려 순서가 돌아오는 기숙사로 이사를 한다. 생활비도 줄고 등-하교 시간도 줄고 아이도 자라니 좋아질 일만 남았다. 부엌살림에 더 투자해서 요리 시간을 줄여야겠다. 어디서든 시간을 만들어야 “가사 노동의 배분”을 둘러싼 싸움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을 테니까.
집안일을 함께 하기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주 괴롭기만 한 것도 아니다. 하기 싫은 일 여자에게 몽땅 떠넘기고 속으로 찜찜해 하면서 겉으로는 갖가지 논리 내세워 큰소리치는 옹색한 인생에 비하면 무엇보다도 떳떳해서 좋다. 내친김에 부풀려 말하자면 “가사 노동”은 “남자다움의 기본”이라고도 하겠다.
다행히 딸아이가 와서 싹둑 글 마무리를 자르지 못해 쩔쩔매는 나를 구해준다.
“아빠, 배고파!”
“그래, 좀 기다려, 금방 차려 줄게.”
이런, 냉동실에서 생선을 꺼내둔다는 걸 또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