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식인에게 보내는 편지 -
소통구조가 핵심입니다.
선후배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푹푹 찌는 더위가 한풀 꺾이고 있습니다. 이제 외국에 나가셨던 분들도 귀국하셔서 개강 준비를 하고 계시겠군요. 지난번에 드린 편지에 대해 여러 선생님들께서 답장을 주셨습니다. 여러 분들이 제 의견에 동의해주시면서 건강을 챙기라고 걱정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어느 한 분은 앞으로 제 편지를 거절하겠다고 답장 주시기도 했습니다.
간접적으로 저를 걱정해주는 소리를 전해주기도 합니다. ‘나중을 생각해서 적당히 할 것’을 주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마 나름대로 저에 대한 기대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거꾸로 요즘 우리 지식사회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합니다. 지식사회를 지켜보면서 소통의 문제를 다시 생각합니다. 진보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어떤 형태의 정치적 해석에서 벗어나 이 문제에 대해 모두가 함께 진지하게 성찰 해보기를 제안합니다.
< 소통권력의 폭력... 영화와 현실사이 >
‘충돌(crash)’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산드라 블록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영화입니다. LA를 무대로 하는 다인종 사회에서 왜곡된 의사소통 구조와 그 희생자들을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백인, 멕시칸, 흑인, 한국인, 이란인 등 여러 인종들이 등장합니다. 이 영화는 오해의 구조 속에 어떻게 개인적 삶이 희생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LA근교에서 사체를 발견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왜곡된 소통구조가 결국 폭력과 개인의 죽음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가장 압권은 한 인물이 우호적 표현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낸 미소가 비웃음으로 전해지고, 이는 곧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지게 되는 상황설정입니다. 웃음이 비웃음으로 오해된다면 이는 사회적으로 대단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일상에서 이런 상황이 주어진다면 우리 삶이 어떻게 변할지 끔찍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남의 일이기만 할까요. 저는 이와 비슷한 일들을 매일 경험하고 있습니다. 단 우리 현실은 영화와 차이가 있습니다. 영화에서 소통의 왜곡이 구조적인 것이었습니다. 반면, 우리의 경우 소수의 ‘소통권력’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와 차이가 있습니다.
홍보처장으로서 정말 속상한 일입니다만, 정부정책을 국민들에게 소개할 때 적지 않은 좌절의 경험을 해왔습니다.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만 지난해 8.15 대통령 기념사의 요점은 올해와 마찬가지로 ‘사회통합’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정작 언론에 의해 ‘과거사 청산의 위헌 여부’로 본말이 바뀌어 무더운 여름을 더욱 짜증나게 했습니다.
얼마전 정책 실무자들과의 대화에서도 그렇습니다. “선거에 이기고 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사회의 문화적, 제도적 수준이 더욱 중요하다”는 요지의 발언이 “선거가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 오도되고 말았습니다. “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한 것을 두고 “그렇다면 아버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냐”고 뒤집어 시비거리를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최근 선후배 선생님들께서 직접 지켜보고 계시다시피 전시 작통권 환수와 관련된 논의를 안보불안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지면에 매일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몇몇 소통권력은 직접 정치적 행위에 나서고 있습니다.
< 소통권력과 지식인의 이종 교배 >
그러면 이런 일이 참여정부에만 국한되었던 일일까요? 이런 일은 진보 개혁세력이 그동안 수없이 경험해왔고 지금도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다른 사람의 경험에 대해서는 그 태도가 정반대로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지금 진보적 개혁적 지식인조차도 몇몇 언론이 제기하는 참여정부에 대한 비판적 의제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소통권력’에 편승해 참여정부 때리기에 적극적으로 의제를 만들어 가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얼마전 어느 선배 학자가 ‘전투적 리더십’으로 개념화하여 참여정부와 언론정책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와 유사한 비판을 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전투적 리더쉽’으로 비판한 그 선배 학자는 ‘좌파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는 점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과거 진보 개혁세력이 경험했던 바에 따르면, 그리고 진보 개혁세력이 제기하려는 의제가 어떻게 왜곡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상황이라면 , 이들이야말로 일부 소통권력이 제시하는 의제에 대해 더욱 ‘전투적’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부동산, 양극화, 사립학교법 등의 사안에 대해 일부 언론과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어낸다고 비판하면서 언론과의 포용적 자세를 주문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투적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일부 ‘좌파’ 지식인들은 거꾸로 참여정부에 관한한 그 의제가 무엇이든 ‘전투적,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갈등과 분열의 책임을 참여정부에 떠넘기려는 일부 ‘소통권력’의 의도를 강화해주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이들은 기묘하게도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과 반대되는 세력과 조우하는 그림을 연출하게 되는 셈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선생님들께서 보다 전략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진정어린 충고를 전해주시고 그에 대해 고마움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보 개혁적 지식사회가 과연 소통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고민이 있는가 하는 의문을 던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 ‘주몽’에서의 소통, 그 세밀한 고리 >
저는 다시 ‘소통’의 문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즘 ‘주몽’을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소통’에 대한 생각의 자락을 펼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빈 공간을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전개하고 있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주몽은 재력과 군사력 등 건국의 조건을 갖춰가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소서노라는 여성을 고리로 한 상단과의 연결, 무기를 만드는 과정에 대한 주몽의 관심과 성과들이 연속극의 주요 내용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정권창출을 위해 재력과 물리력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녀 여미을의 역할도 흥미롭습니다. 천심과 민심을 등에 업고 왕권에 도전하거나 왕권 재창출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오늘날의 언론을 상상케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저의 관심을 끌었던 대목은 시장바닥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는 이야기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작가가 의식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연속극 초반에 잠시 등장했던 이 이야기꾼이 주몽의 권력기반을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한나라에 저항하는 무장투쟁 지도자 해모수에 대한 전설을 전파하면서 바로 주몽의 정치적, 역사적 정당성을 강화하는 기능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권력은 의사소통 구조를 누가 장악하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어느 집단이든 권력을 가진 사람이 논의 구조를 결정하고 의제를 이끌어가게 마련입니다. 한 사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의사소통 구조는 이미 의사결정구조를 제약하게 됩니다. 정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으로 의사결정구조가 정해진 상황에서는 정책결정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소통구조의 민주화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과제 >
우리 사회에서 의사소통구조를 장악한 집단이 누구라고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들은 시민사회와 지식사회를 동원해 자신의 주변에 배치하고 이를 통해 사실상 의제를 주도하고 결정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민주화 과정을 거쳐 절차적, 제도적 민주주의는 달성했다고 봅니다. 이제 어느 곳에서도 절차적 정당성을 갖지 않고서는 어떤 결정도 동의를 받기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절차적 과정에 앞서 어떤 의제를 제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의사소통 구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민주적 소통의 문제는 절차적 민주화가 달성된 이후 가장 핵심적인 민주화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왜곡된 방식으로 소수의 언론과 그에 동원된 일부 지식인들에게 의제 주도권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의사결정구조의 심각한 왜곡현상이며 동시에 권력의 왜곡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소수가 과점하고 있는 소통권력을 보다 균형있고 다양화하는 것은 현 단계 한국 민주주의의 매우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문제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한국사회 담론구조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할 때 사회경제적 의제도 제대로 다뤄질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뤄진다 해도 일부 언론이 유도하는 방향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회철학 전공자로서, 또 짧은 국정홍보처장의 경험에서 감히 말씀드리면 우리 사회에서는 앞으로 어떤 집단이든 자신의 정책적 목표를 실현하는데 소통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고민하지 않는다면 정치적, 사회적 집단으로 존립할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독자적인 소통의 수단을 갖지는 못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의사와 정책이 구김없이 전달될 수 있느냐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노력 없이 어느 사회집단이나 세력도 진정한 권한과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 소통권력이 대중의 역동성에 개입할 때... >
2002년 월드컵때 제가 선생님들께 ‘광장과 의사소통’이라는 주제로 편지를 드린 바가 있습니다. ‘밀실’의 음모가 아니라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소통하고 확인하고 싶어하는 시민 욕구의 또다른 표현이라고 설명드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소통의 광장에 상업주의 등 또 다른 부정적 요인들이 개입해 그 순수성이 훼절되는 순간 대중의 역동성은 떨어지고 소통은 왜곡되기 시작합니다.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대중의 자발적 역동성이 강화될 때 언제나 그것을 오용해 이득을 얻으려는 집단이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이와 유사한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광장이 확대되고 대중 사이의 의사소통이 확장될 때 정치적 민주화는 진보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통 공간에 정치적 의도를 가진 소수의 개입이 시작될 때 그것은 파행되고, 엘리트 사이의 정치적 타협으로 말미암아 대중의 역동성은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최장집 교수는 이를 그람시의 용어를 빌어 ‘수동혁명’이라고 규정했습니다. 4·19, 6월항쟁 등 한국현대사에서 주요한 혁명적 계기들은 정치적 타협으로 왜곡되었고 사회는 보수화되는 과정을 반복해왔다고 설명했습니다.
하버마스는 교육, 언론, 법조, 종교 등에서 시민사회의 의사소통 행위를 통해 정치경제적 민주화를 추동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정치경제적 영역이 부정적 비전을 가진데 비해 시민사회의 의사소통이 지적, 도덕적 정당성을 갖고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 영역이 여전히 권위주의 시스템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우리와 달리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하지만 유럽과 달리, 한국의 경우 교육, 법조, 언론, 종교의 영역을 하버마스처럼 합리성을 가진 것으로 선험적으로 규정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경우 유럽과 정반대라고 해야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들 영역이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도덕적 기반이 아니라 오히려 건강한 공론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할 때 하바마스의 이론이 유의미한 실천전략이 될 수 있을지 난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편지에서 저는 선후배 선생님들께 참여정부의 언론정책을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 지식인으로서 우리 사회가 보다 개방적이고 균형있는 사회로 나아가고자 할 때, 이 소통에 대한 치열하고도 고통스런 문제의식 없이 그것이 가능할 것이며,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근원적 물음을 공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 누구의 위기인가? >
최근 보도를 보면 진보적 개혁적 지식인들의 참여정부에 대한 비판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전 진보 개혁적 지식인들의 학술행사가 언론에 주목받기도 했습니다. 대부분 제가 잘 알고 또 존경하는 분들이라 무슨 논의들이 이뤄졌는지 대체로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참여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그림을 그리려 한 일부 언론의 의도를 제외하면, 이 회의는 지식사회의 위기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변화를 위한 모색으로 모아졌고, 그것은 진보 개혁적 지식인들 나름대로의 몸부림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도에 의하면 이날 회의에서 ‘참여정부의 실정’을 기정사실화 하고 이것이 진보 개혁 세력의 위기를 가져왔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우선 ‘참여정부의 실정’이라는 전제에 대해 단정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하나하나의 사안을 놓고 따져봐야 할 일이지만 제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을 막연한 정서나 여론으로 단정지을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고 봅니다.
특히 한미FTA 협상을 놓고 ‘실정’을 이야기할 수는 더욱 없습니다. 진보 개혁 세력이 반대하는 의제라고 해서 ‘실정’이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그 지평을 넓히지 못한 진보 개혁 세력의 한계에 다름 아니라고 봅니다. 지난번 편지에서 드린 것처럼 진보 개혁 지식사회도 진보성의 재구성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접근해 봐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설령 ‘참여정부의 실정’이라는 막연한 여론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여기에서 진보 개혁 세력의 위기의 원인을 찾는 것이 과연 적절한 진단일까요? 진보 개혁세력은 오류가 없었을까요. 오히려 진보개혁 세력의 위기가 참여정부를 어렵게 만들었다고 한다면 틀린 진단이겠습니까?
저는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적절한 결합을 이뤄내지 못한 진보 개혁세력에 근본적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아울러 진보 개혁 단체들이 대중과의 소통에서 보편성을 획득하는데 실패한 것도 오늘날 진보 개혁의 위기와 무관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변화하는 세계에 대해 과학적으로 사고하지 못한 편협한 도그마에 갇혀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진보 개혁세력도 그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고 봅니다.
이처럼 진보 개혁 세력 전체의 반성에서 출발하는 것이 건강하고 적절한 문제 제기이자 합리적인 대안을 찾는 방법이 아닐까요. 이런 문제의식을 사장한 채 일부 언론의 참여정부를 비판하고 분열시키기 위한 의제에 매몰되거나 심지어 동원돼 위기의 전체 국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지금 진보 개혁세력의 위기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저도 개혁 진보적인 정체성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그 지향을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 진보 개혁세력은 새롭게 재구성되어야 합니다. 이제 그 고민을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물론 어려운 문제입니다. 예전에 한 선배가 ‘노동조합이 과연 진보적인가’라는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후 그 선배가 받았던 고통을 지켜봤습니다.
제가 만나는 수많은 진보 개혁적 지식인들도 위기에 대해 걱정하고 논의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 분들의 노력에 함께하고자 합니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정서’나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사태를 분석하고 진단하는 분위기가 만연해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확한 위기 진단과 처방을 통해 이 시대에 진정 ‘진보의 테제’는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하는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편지가 길었습니다. 입은 있으되 함부로 뱉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오늘의 제안에는 어떤 정치적 의도도 없습니다. 한명의 지식인으로 선후배 선생님들께 우리 시대의 고민을 공론화해보자는 진심어린 제안을 드리고자 합니다. 많은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국정홍보처장의 블로그 "진실의 힘"에서